나의 이야기 66

중국 기술력

기술보다 중요한 것 부분적 진실은 오히려 전체를 왜곡시킨다. 정치에서 대중의 시선을 흐리게 만들 때 쓰는 수법이지만, 때로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부분에 얽매여서 진실을 보는데 실패한다. 19세기에 증기선이 등장했다. 이전의 배는 바람을 타고 항해를 했다. 1850년대 중반에 가장 인기가 좋았던 배는 쾌속 클리퍼 범선이었다. 이 배도 결국 증기선에 밀렸다. 최고 속도는 비슷했으나 속도가 일정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바람의 속도나 세기에 따라서 속도가 달라졌다. 증기선을 가진 서양 국가들, 특히 영국 선박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들은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 국가의 상품도 수송했다. 아시아 안의 물류까지 영국 선박이 도맡았던 것이었다. (1900년 즈음에는 세계 상선의 절반이 영국의 배였다.) “이 정도..

나의 이야기 2021.01.27

물류시스템 관리

중소 기업의 해외진출이 쉬워진 이유 희망봉을 처음 넘었던 사람은 포르투갈인들이었다. 이후 네덜란드가 유럽 최대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이후 영국이 세례 물류를 제패했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순으로 힘의 축이 움직인 셈인데, 이 세 나라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포르투갈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처럼 국가의 지원을 받는 거대한 회사를 소유하지 못했다. 애당초 국가와 함께 움직이기보다 사적인 세력인 성격이 강했던 포르투갈인들이었다. 그들은 나라가 영토를 빼앗긴 뒤에도 장사를 계속했다. 19세기 초까지 페르시아만에서 마카오에 이르는 지역은 포르투갈어가 공용어였다. 이들은 신세계와 아시아를 자유롭게 오가며 무역 활동을 했으나 강렬한 존재감은 없었다. 네덜란드와 영국은 치열하게 경쟁했다. 처음에는 ..

나의 이야기 2021.01.14

이탈리아 해운업

이탈리아 “배를 만들고 싶은데, 나무가 없어!” ‘도시화. 상업과 금융 발달. 은행 탄생. 복식 부기 도입. 보험업 발달.’ 중근세 이탈리아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이 정도의 선진 사회라면 당연히 세계 경제의 패권을 쥐었을 법하다. 그러나 현실은 국가적 쇠퇴였다. 이렇게 발달한 제도에도 불구하고 별 힘을 쓰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내용이 조금 부실했다. 제노바의 산조르조 은행은 1406년 문을 열고 세계 최초란 타이틀을 가져갔으나 이곳에서는 환전과 대출만 했다. 개인 예금을 기업에게 빌려주는 기능은 거의 없었다. 유럽 은행들은 19세기가 되어서야 이 역할을 감당했다. 지금의 은행 역할을 기대할 수 없는, 이름뿐인 은행이었다. 이탈리아에서 해상보험업이 제일 먼저 시작되었으나 어떤 사고가 어느 만큼 ..

나의 이야기 2021.01.08

독도는 우리땅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 “평양에 4~5만 명이 군인들이 들이닥쳐 주둔할 터인데, 이들로부터 여성들을 보호해줄 수 없으니 모든 젊은 한국인 부녀자들은 서둘러 집에서 나와 산이나 먼 곳으로 피해있으라.” 러일전쟁 직전, 평양에서 벌어진 일이다. 일본 영사가 저런 글을 써서 시내의 주요 대문에 방을 붙였다. 1945년 8월, 미군이 들어오기 전 여자들에게 ‘몸뻬’를 겹겹이 입으라고 한 지침이 연상된다. 젊은 여자들이 피신을 했다. 이들을 보호하려고 몇몇 남자들이 함께 길을 나섰다. 그렇게 일본군은 자국 관리들도 감당치 못할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한반도에 들어왔다. 1906년 4월30일, 선교사 노블 여사가 쓴 일기에는 일본 군인들의 행패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살던 집에서 쫓겨난 가족, 좋은 땅을 ..

나의 이야기 2021.01.01

농어업인의 날

농어업인의 날 세종의 권농정책, 이 지역을 주목했다 11월11일. 빼빼로 데이다. 10대부터 젊은 층들에겐 그렇다. 11월11일에는 다른 명칭도 있다. ‘농어업인의 날’이다. 농업만 놓고 이야기하자면, 농업기술은 한때 지금의 반도체 같은 첨단 기술 이상으로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던 분야였다. 15세기 전반 인구가 증가하면서 나라님은 백성을 먹일 일을 최우선 사업으로 여기게 됐다. 이른바 권농정책을 최대 국정 목표로 삼았다. 태종은 이론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1237년 ‘농상집요’를 펴냈다. 이는 중국의 ‘농서집요’(1417)를 이두로 편찬한 책이었다. 여기에 6년 동안 저수지를 만드는 일에 힘을 쏟았다. (세종실록지리지 편찬 당시 전국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저수지는 43였다. 경상도가 20개, 충청..

나의 이야기 2020.12.17

아프리카계 미국인

블랙 벨트의 몰락 ‘재벌’이라는 단어는 곡창지대의 부자에게서 나왔지만, 현재 재벌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기업들은 대부분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에서 탄생했다. 우선 ‘재벌’ 이란 단어는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 나왔다. 고창 김씨 일가인 김성수ㆍ김연수 등에 붙인 단어였다. 그들은 농업으로 축적한 자본을 바탕으로 섬유업 등에 진출했다. (그들 가문은 ‘자기 땅만 밟고도 전라도 일대를 돌아다닌다’고 했을 만큼 가진 땅이 많았다.) 반명 거대 기업의 탄생지는 부울경과 대구였다. 삼성은 대구에서 처음 상회를 열었고, 대우를 일으켜세운 김우중 회자자은 대구 방천시장에서 첫 알바를 했다. 부울경 역시 LG, 롯데를 탄생시켰고, 현대는 산업 기반에 울산에 있다. 농업지와 상업지, 전통적으로 부유한 지역과 신흥 상업도시의 ..

나의 이야기 2020.12.09

코로나 블루 극복

전쟁의 와중에도 ‘일상’은 중요했다 “꽃 사세요!” 사내 하나가 꽃을 가득 꽃수레 앞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 곁에는 바구니를 든 여인도 보인다. 따뜻한 봄날 수레 가득 봄의 전령을 싣고 봄날을 파는 한가한 풍경으로 보인다. 영동(강원도 대관령 동쪽) 지역 고등학생이 한여름에 육상대회를 벌였다. 삼척공고가 우승했다. 학생들은 지도교사와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7월13일, 한 여름에 벌인 젊음의 축제였다. 그해 3월, 대전에 있는 한 초등학교(초등학교)에는 교장이 학부형들에게 편지를 부쳤다. 여러 학교에서 풍금을 단체 구매하는데 판매대금을 십시일반 모아서 구매에 참여하고 싶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교장은 꽃피는 봄날, 아이들이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즐거운 풍경을 내내 마음에 떠올리며 편지를..

나의 이야기 2020.12.05

창의적인 사람

창의적인 삶의 비결 “살풀이춤 수건을 들고 춤을 출 때 그냥 한 손으로 수건을 들어 올려만 보아도 느낌으로 몸에 맞으면 또 하나의 새로운 춤이 됐다. 한 동작 한 동작 자로 잰 듯 정확한 수치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 한국춤의 정신이다.” ‘한국창작춤의 대모’로 통하는 김매자 선생의 말이다. ‘같은 춤’이라도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다른 춤’이 된다는 것이다. 한국 문화의 즉흥성에 대한 이야기로 들린다. 틀린 춤이 아니라 다른 춤이 되려면 기본을 제대로 익혀야 한다. 배정혜 전 국립무용단장은 이렇게 조언했다. “동작을 배우는 초보자들은 우선 동작의 이유를 이해하는 게 급선무다. 춤동작의 형태와 순서를 외우기보다 호흡을 파악하고 감정을 외워야 한다. 즉, 동작을 정서적으로 기억해야 한다. 그 동작의 감성을 ..

나의 이야기 2020.12.03

인스턴트 음식 유래

맥도널드와 짜파구리의 공통점 맥도널드 햄버거와 짜파구리의 공통점이 있다. 이 음식이 인기를 얻은 핵심 키워드에 가족 혹은 가정이 있다는 점이다. 맥도널드의 탄생 배경은 늘어난 인구와 자동차였습니다. 1920년과 1940년 사이 남부 캘리포니아의 주민 수가 세 배 가까이 늘었다. 여기에 1940년 1백만 대의 자동차가 로스앤젤레스에 쏟아졌다. 이 도시에는 미국 어느 지역보다 차가 많았다. 당연했다. 로스앤젤레스는 자동차로 이동하도록 설계된 도시였습니다. 드라이브인 식당이 문을 열었습니다. 주문을 하면 직원이 음식을 가져다줬다. (음식을 가져오는 직원을 카홉이라고 불렀다.) 맥도널드 형제는구인난에 신물이 났습니다. 카홉과 조리사가 사표를 던지는 일이 잦아서 늘 새로운 조리사와 직원을 찾아야 했다. 고민 끝에..

나의 이야기 2020.12.01

미생 명대사

회사가 전쟁터라고? “회사가 전쟁터라고? 밖은 지옥이야.” ‘미생’이라는 드라마에 나온 한 대목이다. ‘비유’다. 그럼에도 공감하는 이들이 많았다. 전쟁터만큼의 치열함이 느껴질 때가 많은 까닭일 것이다. 회사와 전쟁터의 상관관계를 고찰할 때, 충분히 설득력 있는 비유이기도 하다. 12세기, 영국에서는 인클로서 운동이 일었다. 양털로 모직물을 만들어 해외에 수출하는데 재미를 붙인 지주들이 곡식을 일구던 땅을 초지로 바꾸는 작업에 들어갔다. 초반에는 농민들이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초지로 바뀌는 농토가 그다지 많지 않은 까닭이었다. 15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사이에 사정이 악화됐다. 정부에서 세금 수익을 늘리려고 지주들에게 인클로저 운동을 적극 권장한 결과였다. 이때가 2차 인클로저 운동 시기였다. 3차는 ..

나의 이야기 2020.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