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농어업인의 날

짱구는옷말려요 2020. 12. 17. 14:20

농어업인의 날

 

 

 

 

 

세종의 권농정책, 이 지역을 주목했다

 


11월11일. 빼빼로 데이다. 10대부터 젊은 층들에겐 그렇다.

 


11월11일에는 다른 명칭도 있다. ‘농어업인의 날’이다.

 

 

 


농업만 놓고 이야기하자면, 농업기술은 한때 지금의 반도체 같은 첨단 기술 이상으로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던 분야였다. 15세기 전반 인구가 증가하면서 나라님은 백성을 먹일 일을 최우선 사업으로 여기게 됐다. 이른바 권농정책을 최대 국정 목표로 삼았다.

 


태종은 이론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1237년 ‘농상집요’를 펴냈다. 이는 중국의 ‘농서집요’(1417)를 이두로 편찬한 책이었다. 여기에 6년 동안 저수지를 만드는 일에 힘을 쏟았다. (세종실록지리지 편찬 당시 전국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저수지는 43였다. 경상도가 20개, 충청도 14개, 전라도 4개, 경기도 3개, 황해도 2개, 강원도 1개였다.)

 

 

 


권농정책이 나름 성과를 거둔 것은 세종대에 이르러서였다. 농서를 편찬하고, 새로운 수리시설 확보에 천문 관측기구를 만들었다.

 


태종도 농서를 편찬했지만 세종대와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었다. 태종은 중국의 농법을 소개한데 그친 반면 세종은 나라 안에서 농법이 첨단을 달리는 지역의 기술을 채록해서 출간했다.

 

 

 


1428년, 임금이 농서 편찬을 지시했다. 1년 뒤(1429년) ‘농사직설’이 간행됐다. 책임자 정초(鄭招,?~1434)는 임금의 명을 받아 박서생(朴瑞生, ?~?)과 함께 나라 안의 농업기술을 채록해 소개했다. 상경농법과 수전농법이 핵심이었다. 전자는 논밭을 해를 묵히지 않고 계속 경작하는 방법이었고, 후자는 논을 물로 채운 후 씨앗을 뿌리거나 모내기를 하는 경작법이었다.

 


문제는 수경직파법에서 발생했다. 이 선진 농법을 적용하자니 물을 원활하게 공급해야 했다. 태종대의 저수지 축조는 별 효과가 없었고, 도랑을 보로 막는 방법이 효과적이었다. 세종 임금은 보다 원활한 물 공급을 위해 일본의 수차를 주목했다.

 

 

 


세종이 수차를 주목한 계기는 1428년 통신사가 파견이었다. 총책임자(정사)는 박서생이었고, 김극유란 인물이 사행 중의 사건을 기록하여 임금에게 보고하는 임무를 담당한 서장관을 맡았다. 역사는 박서생이 임금에게 수차를 적극 추천했다고 전한다. 김극유는 수차에 대한 기록을 보고서에 풍부하게 담았을 것이다.

 


세종의 권농정책과 관련해 또 다른 역사는 1444년 세종이 지방관에서 내린 ‘권농교서’였다. 이 권농교서는 하위지(1412년~1456년)가 저술했다. 하위지는 1402년(태종2) 문과에서 부장원을 한 하담의 아들로 ‘농사직설’을 쓴 정초와 박서생보다 한 세대 아래였다. (박서생은 1401년, 하담은 1402년, 정초는 1405년에 각각 문과에 합격했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선산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하담과 정초는 선산 영봉리 출신이었고, 하담과 대과에 함께 급제한 김극유는 길재의 제자로 선산의 속현인 해평 사람이었다. 길재는 선산을 상징하는 큰 스승이었다. 결국 정초와 박서생, 김극유, 하위지까지 모두 선산 출신이었다.

 

 

 


왜 하필 선산이었을까? 당시 선산은 조선에서 최고의 농업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농사직설’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진 수전농법은 다름아닌 선산이 실행하고 있던 선진농법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세종의 권농정책은 ‘선산농법’의 전국 확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선산이 농업이 발달한 데는 사연이 있다. 선산은 선진 농업 지역이기 이전에 교통의 요지였다. 고려말 영남대로로 놓이면서 선상은 양산-밀양 구간과 함께 대로와 강이 나란하게 늘어진 지역이 되었다. 선산에는 관영나루인 여차니진과 낙동나루를 품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물류가 집중되었고 인구가 늘어났다. 이에 늘어난 인구의 부양을 위해 개간과 새로운 농법의 시도가 필요했고, 이것이 농업 기술을 발전시킨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교통의 중심지에 물류 센터를 비롯해 다양한 산업이 몰려드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다.

 

 

 


선산은 농업기술만 놓고 이야기하면 수도권을 압도하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이 가진 농업 노하우와 경제적 번영은 ‘조선 인재의 절반이 경상도에서 경상도 인재의 절반 선산에서’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이 격렬하게 쪼그라들고 있다. 지역 전통 명문대를 졸업한 청년들은 졸업장을 받아들기가 무섭게 수도권으로 빠져나간다. 선진기술과 경제적 번영 같은 수식어를 걸어도 괜찮아 보이는 지역이 점점 더 사라지는 까닭이다. 게다가 국내에서 가장 큰 물류공항이 서울 뒤에 숨어버린 형국이어서 지방이 물류의 이점을 취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공부든 경제든 서울 사람 못잖은 위세를 자랑한 선산의 역사는 그저 지역의 역사를 넘어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이 점점 더 요원해지고 있는 이 시대에 다시 한번 곱씹어봐야 할 ‘모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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