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경제
그들이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것
“산미증식도 좋고, 원시산물을 증식하는 일도 매주 좋지만, 농공을 병행하여야만 국가 경제가 발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째서 산미증식의 자금만 받아 오고, 공업을 진흥하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습니까?”
일제강점기 조선, 돈 좀 있는 일본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1941년에 열린 경성상공회의소 25주년 기념 좌담회였다. 이 자리에서 다가와 쓰네지오란 인물이 시모오카 추지 정무총감에게 던졌던 질문이었다.
조선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상인들의 입장에서는 경제규모가 더 커져야 장사도 더 잘 될 거였다. 왜 조선의 경제 규모를 키우지 않는지 그것이 궁금했을 것이었다. 이에 정무총감은 솔직하게 답변을 해주었다.
“과연 그것은 자네 말대로다. 국가 경제는 농공병진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고 그것은 잘 알고 있지만, 내지의 모든 회합, 혹은 내각에서 조선에 공업을 일으키자고 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이를 반대한다.”
왜 반대했을까?
“내지에서는 요즈음 공장이 있지만 일을 쉬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조선에서 이러한 공장에 원료를 보내어 생산품으로 만든 뒤 다시 조선으로 들여보내는 것이 방침이다. 그러니까 조선의 공업 자금이나 원조에 관한 이야기를 해도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다양한 산업의 발전은 중요한 문제다. 감자농사처럼 다양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경제 변화에 취약하다. 주력 생산품의 가격이 떨어지면 버틸 힘이 없어지는 까닭이다.
일본인의 지적대로 조선은 쌀농사를 장려하고 토목공사나 벌였을 뿐이었다. 체질적으로 봤을 때는 오히려 악화했다. 1920년대부터 쌀 가격이 서서히 하락하면서 조선은 더 궁핍해졌다. 수탈과 함께, 경제 구조의 취약성이 조선을 휘청거리게 만들었던 거였다.
게다가 일본에서 흘러든 투자금은 조선 내 일본인들이 독점했다. 이중의 착취를 당하고 있던 것이었다.
요컨대, 일본은 조선의 공업화가 아니라 공업화 억제 정책을 펼쳤다. 1930년대 공업이 발전했지만, 이는 만주국이라는 새로운 시장의 확보로 가능해진 일이었다. 게다가 조선에서 생각하는 제품은 대부분 저품질이었다. 그마저도 일본은 조선 내 공장의 수를 제한했다. 농촌의 늘어난 인구를 수용할 공장은 현저하게 부족했다.
참고>
도리우미 유타카, <일본학자가 본 식민지 근대화론>, 지식산업사,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