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장군 업적
이순신 부대의 ‘짬밥’이 궁금하다면...
이상만 드높으면 굶어 죽는다. 전쟁터에서 승패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오로지 승패에만 집착하는 리더들이 존재하는 까닭이다.
이순신은 언제나 이겼지만, 그는 작전만 짠 인물이 아니었다. 전쟁이 필요한 모든 것, 먹고 자고 입는 것에까지 관심의 폭을 넓히고 있었다. 군대가 아니라 회사를 운영하는 듯한 느낌까지 든다.
해로통행첩은 장군이 군량미 보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튀어나온 아이디어였다. 이언적의 손자 이의온(1577~1645)이 생각해냈다. 장군은 그의 건의 받아들여 이를 시행했고, 10일만에 1만 석의 군량을 조달했다.
장군은 사실 군량미 조달 전문가였다. 그는 32세에 급제한 후 하급 관직을 전전하다가 10년 만에 만호로 임명됐다. 임지는 두만강 하구였다. 그는 여진족과 대치한 상황에서 두만강 하구의 삼각주인 녹둔도에서 둔전을 일구었다.
임진왜란에서도 그의 경험은 십분 적용됐다. 1593년 1월 26일에 유민을 모아 돌산도에서 둔전을 일구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먹여 살려야 하는 수군만 6,000여명이었다. 결국 돌산도 둔전을 허락받았다.
병사들이 추위에 떨까봐 1594년과 이듬해에 대규모로 삘기를 채쥐하기도 했다. 삘기로 거적을 만들어 배에서 솜이불처럼 덮었다.
장군은 수산물팀도 만들었다. 송한련이 수산물이나 고기로 군량을 사겠다고 건의한 것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1594년 3월에 미역을 땄고, 이듬해부터 청어와 조기를 시장에 내놓았다. 병사들의 밥상에도 올린 것은 물론이다.
1595년 11월에는 ‘난중일기’에 청어가 등장했다.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11월 21일 기록에 따르면 청어 13,240두름을 내놓았다. 1두름은 20마리였다. 청어를 잡는 팀과 말리는 팀, 교환 담당자가 따로 있었다. 회사처럼 부서별로 업무를 분담해 일을 처리했다.
소금도 생산했다. 우선 큰 솥을 만들었다. 그 솥으로 소금을 만들었다. 소금 생산을 시작한 계기는 칠천량 전투였다. 수군이 몰살당하는 바람에 둔전제의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긴급하게 군량을 조달하려고 소음도를 비롯해 12개 섬에 염전을 설치했다. 1597년 10월 20일의 일이었다.
마(麻)도 샀다. 병사들이 입을 제복뿐 아니라 돛과 수산물 채취를 하는데 쓰는 그물을 만드는데도 꼭 필요한 원재료였다.
수산물을 시장에 판 덕에 재정 사정이 넉넉했던 듯하다. 장군은 사군과 격군에게 급여를 지급했다는 기록도 남겼다.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시 통념을 따르자면 강제로 징발해 노를 젓게 하면 그만이었다.
첩보 활동도 원활했다. 이 또한 재정이 넉넉한 덕을 봤다. 첩보원들에게 상당한 양의 곡식과 소금 등을 대가로 지불했다. 정보망이 튼튼하고 정보량이 풍성했다.
한편 옥포해전 승리 후 전투에서 이기면 이익이 생긴다는 동기 부여를 위해 빼앗은 쌀 300섬을 격군과 사군들에게 나눠주고 의복과 목면 등을 군사들에게 주겠다고 장계를 올리기도.
전쟁통에 포상금까지 챙겼다. 옥포해전에서 승리한 후 쌀 300섬을 격군과 사군들에게 나누어주고 군사들에게는 의복과 면목 등을 주겠다는 장계를 올렸다.
장군은 이 모든 일을 체계적으로 진행시켰다. 들어오는 물품과 나가는 물품의 목록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회계 처리했다.
그의 수군이 왜 싸우기만 하면 반드시 이겼는지 이해하려면 단순히 우수한 무기나 작전 만을 놓고 이야기해선 안 된다. 물론, 효과적인 공격을 위해 거북선을 비롯해 화포와 화살 등을 연구 개발하기도 했지만, 장군은 그보다 훨씬 많은 부분에서 리더십을 발휘했다.
참고>
이순신포럼10주년기업사업단, <이순신을 만나다>, 책익는마을,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