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재미있는 불교이야기

짱구는옷말려요 2019. 12. 10. 20:57

재미있는 불교이야기



나는 억울하다






조선은 불교를 억압했다. 이성계가 불교신자였던 까닭에 이를 적극 말렸어도 이런저런 잡음이 일면서 탄압은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다.



조선의 두 번째 왕 정종(재위 1398~1400)은 승려들이 시도를 받으면서 간통한다면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것을 못 하도록 했다. (정종 1년[1399] 3월9일).






태종대에 이르러 심각한 상황이 전개됐다. (이성계도 막지 못할 만큼).



‘금산사 주지 도징이 절의 여종 강장과 강덕 자매와 간통하고, 토전의 소출과 노비의 세금을 모두 사사로이 사용하였으며, 와룡사 주지 설연이 절의 여종 가이 등 다섯 명과 간통하였다.’ - 태종 5년(1405) 11월 21일 의정부 보고



절의 재산을 압류하고 절간에 딸린 노비를 환속하도록 했다.






승려라고 사리만 만들고 있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그들이 천명한 삶의 계율이 너무도 고고했기에 비난 또한 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러 기록 중에 성종 1년, 1470년 2월3일에 보고된 펙트가 가장 눈에 띈다.

 

‘장례원에서 금교도 찰방 신복담의 계본(보고서)에 의거하여 아뢰었다.

“지금 금교도 부근에 살던 중이 간통하여 낳은 소생이 모두 130구(口)이니, 청컨대 각 참에 나누어 붙여서 역로(驛路)를 실하게 하소서.”

이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승려의 자식이 130명이라는 이야기다. 보기에 듬직한 사람이었을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단순히 바람기라고 말하고 넘어가기엔 뭔가 미진한 느낌이 든다.





김생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직업은 소금장수였다. 원래는 이방 일을 하다가 자식이 너무 많이 태어나는 바람에 식구들을 먹여 살리려고 장삿길에 나선 거였다.



그는 이 마을 저 말을 다니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중 그를 가장 반긴 사람은 과부들이었다. 운우의 정이 그립기도 했고, 당시는 아이가 태어나면 든든한 노동력이었다. 일종의 노후대비까지 되었던 셈이다. 그는 ‘부탁’받고 과부들의 집을 들락거렸다. 심지어 강원도 태백산 자락에서는 돈은 많지만 몸이 약한 노인의 부탁을 받고 그의 첩들에게 들어서 임신을 시켜주기도 했다. 물론 넘치는 감사 인사까지 들었다. 그렇게 20년 동안 아들만 83명을 낳았다.



그쯤 되자 그는 ‘과부’들을 위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자식들을 모두 불러모아 마을을 이루어볼 생각을 했던 것이었다. 그들은 만경평야에 몰려들어 황무지를 개간했다. 만경평야 일대에는 수백 호의 집이 들어섰다. 모르긴 해도 과부 어머니를 모시고 해서 노후를 편안하게 해드리지 않았을까.






승려의 130명에 이르는 자식들 중에 아들이 몇인 줄은 모르겠으나 아마도 김생과 비슷했을 것이다. 김생은 기이하긴 해도 격렬한 비난을 받지는 않았던 듯하다. 승려의 사연도 깊이 들여다보면 김생만큼의 ‘경제적’ 혹은 ‘문화적’ 이유가 있지 않을까.






“멀쩡한 남자는 다 지아비가 있고, 나는 임자 없는 남자 외에는 만날 수가 없다네. 늙어질 나를 부양해줄 아들이나 낳아 보세!”



절로 가는 아낙이 이런 혼잣말을 중얼거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이비 종교  (0) 2019.12.26
나가사키 성지순례  (0) 2019.12.22
시대의 개혁가들  (0) 2019.12.09
교훈을 주는 명언  (0) 2019.12.08
갈릴레이  (0) 2019.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