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개혁가들
‘누군가’는 누굴까?
루터와 에라스무스는 비슷한 시대를 살았다. 루터는 개혁가, 에라스무스는 인문주의자로 역사에 남았다. 에라스무스가 훨씬 지적으로 비치긴 한다. 그럼에도 에라스무스에도 만만찮은 반골 기질이 있었다.
‘우신예찬’과 ‘추방당한 율리우스’ 등의 작품이 그것이다. ‘카톨릭교회에 대한 인문주의적 풍자’라고 평가되는 작품이다. 다만 루터의 반박문과 비교하면 흥행 실적이 초라하다. 루터는 말 그대로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 반응은 루터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루터는 카톨릭 교회를 떠날 마음이 없었다. 그는 카톨릭 교회의 시스템을 인정한다는 의사를 명백하게 표시했다. 그가 반론은 찻잔 속의 폭풍으로 ‘예견’되는 사건이었으나, 1518년 4월 하이델베르크에서의 총회와 같은 해 10월 아우크스부르크에 가서 카예타누스의 심문을 받은 일을 거쳐 작센으로 번졌다. 작센을 다스리던 프리드리히는 루터를 로마로 보내든지 작센에서 추방하라는 교황정의 요청에 고민에 빠졌다. 그때 에라스무스가 등장했다. 그는 프리드리히를 만나 이렇게 조언했다.
“이 문제를 명망 있고 신뢰할 만한 재판관이 해결하도록 한다면 그것이 교황을 위해서도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세상은 진정한 복음에 목말라하며, 시대의 흐름도 모두 그쪽으로 향하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야비한 방법으로 그를 반해서는 안 된다.”
사실상 ‘개혁가’ 루터를 지지한 발언이었고, 프리드리히는 에라스무스의 말을 받아들였다. 1519년 7월4일 라이프치히에서 공개 토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합의도출에 실패, 결국 1521년 4월 루터는 교황청과 완전 결별했다. 파문을 당한 것이었다.
온건한 루터가 교황청으로부터 ‘멧돼지’ 혹은 ‘뱀’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개혁가로 돌변하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있다. 당시에도 알려지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는 루터의 활동 초기에 등장했다. 루터가 반박문을 발효했을 때(루터의 주장마저도 이전이 이미 터져 나왔었다.), 누군가가 그것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대중이 루터의 ‘의견’을 알게 된 것이었다. 이는 라틴어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독일어가 가진 대중적 파급력이 루터를 지금의 루터로 만든 셈이었다. 반면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이나 ‘추방당한 율리우스’ 등은 강렬한 비판 의식에도 라틴어로 쓰였기 때문에 당대의 폭풍도 거의 지식인에 한정되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독일이 발칵 뒤집어지자 15세기 초 형성된 에라스무스를 중심으로 한 인문주의자 ‘네트워크’는 루터의 95개를 유럽 전역에 신속하게 전파했다.
참고>
정기문, <14가지 테마로 즐기는 서양사>, 푸른역사,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