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라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 만으로는 부족
<삼국사기> 권9, 효성왕본기 ‘6년(742년) 여름 5월 왕이 돌아가시어 시호를 효성이라 했다. 유언에 따라 널(棺)을 법류사 남쪽에 세우고, 그 뼈를 동해에 뿌렸다.’
“문무왕의 무덤은 수중릉입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시대마다 답이 다를 듯하다. 적어도 오랜 기간 동안은 “그렇다.”는 답이 나왔을 것이다. 현대에는 달라졌다. 탐사와 다양한 연구 결과 그저 동해에 유해를 뿌렸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지금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아니다가 무척 중요할 것이지만 그 펙트만으로 과거를 재단하면 안 된다. 왕이 바다에 무덤을 만들었다고 믿었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다수 혹은 국민들이 그렇게 인식을 했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국가나 공동체는 소수의 리더십도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의 생각과 뜻으로 운영되기 마련이다. 문무왕을 어떻게 했느냐하는 펙트 못지 않게 이 역사를 받아들인 국민들과 후대들의 반응도 중요할 것이다.
문무왕 이후 바다에 유해를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긴 왕이 2명이나 등장했다. 34대 효성왕(재위737~742)와 37대 선덕왕(재위 780∼785)이었다.
바다에 이토록 애착을 가진 왕들이 또 있었을까. 신라는 삼국 중에서도 특별했고 이후에 세워진 나라와 비교해서도 바다에 남다른 애착을 가진다. 걸출한 인물을 놓고 봐도 장보고와 이사부가 모두 신라라는 국호 아래 탄생한 영웅들이다.
신라의 독특한 정체성을 인식한 조선 후기의 학자가 있었다. 박제가였다. 그는 신라를 이렇게 묘사했다.
“가장 약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유는 해상무역.”
그렇다면 소국들 사이에 강국에 불과했던 신라에게 날개를 달아준 사건은 바로 이사부가 태백산맥 너머에 있던 해상왕국이었던 실질국의 총독으로 동해 바다를 안정시킨 사건이 아니었을까.
신라(사로국)은 음즙벌국의 병합에 이어 실직국과 압독국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울산부터 삼척까지의 해상 교역로를 장악했다. 이를 통해 김해를 중심으로 들어선 가야제국과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는 배경을 확보했다. 박제가의 분석대로 이사부에서 출발한 신라 왕들의 바다에 대한 애정과 도전정신이 삼국의 경계를 허무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이사부의 존재 가치를 울릉도 정복 즈음으로 인식한다면 우리는 ‘왕의 무덤이 바다에 있다’고 믿었던 선조들보다 훨씬 뒤처지는 영토와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참고>
신종원, <삼국유사 깊이 읽기>, 주류성,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