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삶과음악

짱구는옷말려요 2019. 12. 5. 19:04

삶과음악


노래란 무엇인가




“아악은 본시 우리나라의 성음이 아니고 실은 중국의 성음인데 중국사람들은 평소에 익숙하게 들었을 것이므로 제사에 연주하여도 마땅할 것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을 듣고 죽은 뒤에는 아악을 연주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모르겠다.” (세종 12년 9월)






늘 느끼는 것이지만, 세종의 말에는 울림이 있다. 제사를 지낼 때 죽은 이들의 혼령이 와서 음악을 즐겼다고 확신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음악과 인간 혹은 삶과 음악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음악이 퍼질 때는 대부분 유행가다. 유행가는 대부분 가볍게 다가온다. 애써 찾아듣지 않아도 여기저기 듣다 보니 익숙해진다. 그렇게 ‘그 시절 들었던’ 익숙한 멜로디와 가사로 사람들 마음에 남는다.



가볍게 찾아와 익숙해진 음악의 힘은 어느 정도일까. 세종이 죽은 이들을 산 사람처럼 느끼게 해준 존재는 음악이었다. 당시 최신 해외음악에 심취해 있던 신하들은 미처 자각하지 못했을지 모르나, 세종은 음악과 인간의 관계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초, 중국 허난성에 큰 비극이 있었다. 1937년 중국군이 일본군의 진격을 막으려고 황허강의 제방을 터뜨렸다. 농지는 폐허가 됐다. 1942년 6월부터 가뭄이 시작되더니 10월에는 메뚜기떼가 습격했다. 가뭄은 43년까지 계속됐다. 그 사이 300만이 굶어 죽었고, 1250만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많은 이재민들이 바오지로 갔다. 바지오는 허난 사람들이 몸을 실은 룽하이 선 철도의 종착역이었다. 바오지에 100만여 명이 정착했고 이 지역은 ‘작은 허난’으로 불렸다. 인구의 78%가 허난 사람이었다.



피난길에 오른 건 사람들뿐이 아니었다. 예극이란 공연도 함께 길을 떠났다. 사람들은 고향의 공연예술인 예극을 사랑했고, 공연 기술을 가진 공연단도 바오지까지 흘러들었다. 피난민들은 고단한 피난길에도 예극을 보고 싶어 했다.






바오지에는 허난 출신의 예극 배우 창샹위(常香玉)이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바오지에 정착한 허난 사람들과 밀가루공장 사장을 돈을 내 ‘허성 극장’을 지은 후 거기에서 자선공연을 했다. 나중에는 ‘샹위 극장’으로 불렸다. 창샹위는 자선 공연과 함께 이재민들을 초청해 무료로 공연하기도 했다.







‘청아한 노랫소리와 아름다운 춤이 비상하고, 옛 영광을 지난 서쪽 땅 산시에 그 이름이 향기롭구나. 은색 조명을 받아 아름답기가 옥 같으니, 극장 가득한 관객의 얼굴이 취한 듯 붉다.’



가뭄과 죽음, 피난에서도 이들에게는 듣고 싶고 함께 부르고 싶은 노래가 있었다. 공연과 노래는 언뜻 가벼운 유희처럼 다가오지만 삶의 굴곡에 스며들면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의 옷을 입게 된다. 죽은 자마저 ‘듣던 음악’을 듣고 싶어 할 것이라는 세종의 말은, 논리적인 차원의 말이라기보다는 인간과 음악의 관계를 깊이 고찰한 끝에 얻은 결론이 아닐까.



참고>

멍레이ㆍ관궈펑ㆍ궈샤오양 외, <1942 대기근>, 글항아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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