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신라시대

짱구는옷말려요 2019. 12. 2. 13:36

신라시대




먼 데서 온 손님




중국은 안중에도 없었다. 4세기에서 6세기 사이 신라의 이야기다. 신라는 286년에서 564년에 이르는 278년 동안 중국에 4번의 사신단 파견을 결행했다. 이 정도면 국교가 없었다고 해도 다름없다. 게다가 이 기간 동안 한국 측 사료에는 중국에 관한 기록이 없었다. 신라는 법흥왕( ? ~ 540) 시대에 이르러서야 중국문화를 수용했다. 지증왕 이전에는 중국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이 시기 중국의 정치와 경제 제도 역시 신라도 스며든 흔적이 거의 없다. 중국문화를 거의 필요로 하지 않았다. 신라는 중국을 넘어 더 넓은 세계와 교유하고 있었고, (어쩌면) 중국에 그다지 큰 호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 맞은편에 산이 많고 여러 왕들이 다스리는 신라라는 나라가 있다. 그곳에는 많은 금이 생산되고 있다. 그곳에는 많은 이슬람 사람들도 정착해 있었다. 중요 생산품으로는 금, 인삼, 작물원단, 말안장 장식, 도기, 검 등이 있다.’ - 이븐 쿠르다드비, <왕국과 도로총람>, 845년



신라는 아랍과 교유했다. <왕국과 도로총람>에 따르면 신라의 물건을 구매하려고 신라에 정착하다시피 한 이슬람 상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신라의 상품을 서방 세계에 전했다. (신라 38대 원성왕의 괘릉에 서 있는 무인상은 아랍인을 닮았다.)






아랍에 정착한 신라인은 없었을까? 배가 오갔다면 충분히 가능한 상상이다. 서구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잡은 신라인은 분명 있었던 듯하다. 이희수 교수는 <세계문화기행>에 이런 탐사 내용을 실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인) 리야드 마을에서 동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후푸르라는 마을에 고대 한국인의 후예가 살고 있음을 듣고 찾아 갔다. 후푸프의 ‘알 윤 AL Yun’이라는 마을에서 어머니가 한국계인 칼릴 이브라힘이라는 남자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옛날에 윤(尹)이란 장군이 전쟁에서 무공을 세워 (이슬람의 술탄에게) 마을 하나를 포상으로 받았는데, 윤 장군의 명예를 칭송하기 위해 마을이름을 ‘알 윤’이라고 하였으니, 그곳이 이 마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여섯 가족의 고대한국인의 후손이 살고 있다고 한다. 거기에서는 실제로 콩으로 메주를 쑤고, 고춧가루를 즐겨 먹으며, 한국식 한방 처방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신라 왕과 귀족의 무덤에서 나오는 유물 중에는 로마 문화와 연결된 것들이 많았다. 신라는 세계의 끝까지 소통하고 있었다. 신라는 땅과 바다를 막론한 실크로드의 주요 세력이었다. 인적 교류에서도 유라시아 대륙 전역을 무대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제강점기 신라 고분을 들여다본 일본 학자들은 몇 가지 확신을 가졌다. 첫째는 신라의 왕관이 중국과 유사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고대 로마의 왕관과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로마에서 실제 식물(월계수)을 엮어 머리에 쓰다가 금속으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잎과 풀, 나뭇가지의 모양이 신라 왕관에 그대로 드러난다는 보았다. (하마다 코우사쿠 교토대 교수)






‘신라의 보관은 그리스풍 꽃잎모양의 왕관인 코로나와 페르시아풍 머리띠 모양의 대륜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서아시아 왕관 계통 속하는 것으로 북아시아와 남러시아 스키타이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여기에 한국에서 탄생한 것으로 보이는 관모와 새 날개 장식에서 발전된 새날개모양 장식의 내관과 결합함으로써 마침내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으나, 신라에는 미인이 많았다. <진서>에 따르면 382년 내물왕이 진왕에게 미녀를 바쳤다. 진나라 중국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그 나라는 백제 동쪽에 있는데 나라 사람들은 숱이 많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어 머리카락의 길이가 1장이 넘는다’라고 쓰여있다. 당나라는 한때 중동의 미인들에게 홀렸다. 신라에는 이슬람상인들과 인적 교류가 있었던 만큼 혈통이 꽤 섞여들었을 것이다. 지금도 세계적인 미인대회에서 수상자는 대부분 혼혈이다. 신라 역시 그런 혼혈이 많았던 까닭에 미인의 나라라는 별칭을 얻었던 게 아닐까.






신라의 대외 교류는 어느 정도였을까. 5~6세기 한국과 일본, 중국에는 공통적으로 로마유리가 출토됐다. 당시 중국의 중심은 서안, 한국과 일본과 비교해 서안에서 발견된 로마유리의 양이 적다. 극동에서는 중국이 거대한 벽이자 창구 역할을 했다고 여겨지지만, 5~6세기는 사뭇 다른 구도와 교류의 방식이 있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심지어 지금까지도 한반도에서 가장 후진지역이라고 여겨지는 신라는 그러나 삼국을 통일했다. 현재 무역강국이라는 대한민국의 이미지와도 겹친다. 신라에는 ‘후진지역’이라는 편견 속에 가려진 거대한 에너지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중국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정도로 먼 세계를 향한 동경과 도전 정신이 신라정신의 요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대한민국처럼.



참고>

요시미즈 츠네오, <신라가 꽃피운 로마문화>, 이영식 옮김, 미세움,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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