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군위 의성땅

짱구는옷말려요 2019. 12. 1. 15:08

군위 의성땅



의성과 군위, 왜 그럴까?





김해나 구포에서 올라온 소금배는 낙동강을 타고 안동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나루터는 사람을 강 건너로 보내는 역할도 했고, 동시에 물자를 실어나르는 거점이었다. 그런 만큼 나루터마다 다양한 이야기가 스며 있다.






사문진은 신라 임금님 이야기부터 등장한다. 달구벌이 한때 신라의 새로운 수도로 거론된 적이 있어 그런지 사문진은 신라 임금님이 꽃놀이를 오던 곳이라고 전한다. 신라 때 토성을 쌓아 공물을 저장해 두었다가 도성으로 가져가 임금에게 바쳤다고 한다.



사문을 승려를 뜻하는 말이다. 고려시대에 사찰에서 높은 고개를 넘는 사람이나 나룻가에 오는 사람을 위해 원집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눔의 실천이었다.



사문진은 기찻길이 열리고 자동차 통행이 늘어나던 시절에도 이용을 했다. 구포에서 올라오는 뱃길이 뜸해진 뒤에도 배로 대구와 화원, 다산면을 연결했다. 배도식의 <한국 민속의 원형>(1995)에는 큰 배는 자동차 6대를 실을 수 있는 대형 평저선이었다고 기록했다. 1993년 사문진교가 놓이면서 배가 사라졌다.







고령의 개포는 서상돈이 활약했던 곳이다. 개포에서 출발해 낙동강의 거상이 되었다. 개포나루는 대가야 이후 중요한 수운의 거점으로 이용되기 시작해 왜, 중국 등과 교육 루트였다. 영남 내륙의 농산물이 이 나루터에 몰렸다.



개포는 조선시대에는 소금배의 집결지로도 유명했다. 소금을 내릴 때, 소금 한 섬에 엽전 한 닢씩 받아 소금창고를 지키는 순라군을 운영하는 경비로 썼다. 고령군에서는 이곳에 기념 공원을 만들었다.






밀양의 삼랑진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곳이었다. 강폭이 넓고 수심이 깊었다. 1765년에 조창에 들어섰고, 여섯 개 고을의 세곡선이 드나들었다. 육로와도 잘 통했다. 남쪽으로는 김해의 금곡역에 가까웠고, 북으로는 삼랑리 뒷기미고개 너머로 영남대로 지나는 무흘력과 파발참이 있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배의 규모다. ‘경국대전’에는 강으로 다닐 수 있는 큰 배의 규모를 15미터 이상으로 언급했다(길이 오십자, 너비 열자 세치 이상). 이 배가 다닐 수 있는 구간은 구포에서 삼랑진까지였다.



최근 대구통합공항 이전 문제가 불거졌다. 조선시대의 큰 나루터처럼 교통과 물류의 거점을 새로 만드는 논의다. 처음에는 밀양이 언급되었다가 이제는 부산과 대구 지역이 양분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대구공항을 의성으로 옮기느냐 군위로 옮기느냐의 논의에서 의성은 대부분 찬성인 반면 군위는 끝끝내 어깃장을 놓는 모양세라는 점이다. 의성은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 큰 나루터가 존재했던 반면 군위는 전혀 없다. 역사적 경험이 미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결정에도 영향을 미치는 듯.



참고>

김봉우, <낙동강 옛나루>, 도서출판 경남, 2019년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라시대  (0) 2019.12.02
보편적 가치  (0) 2019.12.01
르네상스 복고  (0) 2019.11.29
도스토옙프스키 명언  (0) 2019.11.27
아이슈타인 아이큐  (0) 2019.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