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의 뇌에서 발견란 `진짜` 비밀
“젊게 삽니다.”
저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군요.”하는 류의 대답 대신 “증거를 대시오.”라고 말하면 그저 웃고 만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증거를 대라면 뭐라고 말하기 궁색해진다.
아인슈타인은 강렬한 증거가 있었다. 그의 뇌였다. 아인슈타인이 죽은 후 그의 뇌는 얇게 잘려져 여러 과학자에게 나누어졌다. 필라델피아 아동병원에서 일한 루시 로크애덤스도 그 슬라이스 중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아인슈타인의 뇌에서 가장 감명을 받은 것은 색이었다. 사람은 노인이 되면 뇌에 갈색 색소가 눈에 띄게 축적된다. 늦가을 낙엽처럼 맑은 색이 퇴색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갈색 색소가 거의 없었다. 로크 애덤스는 말했다.
“그 뉴런들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어요. 기본적으로 젊은이의 것처럼 보이는 뇌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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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놀 듯이 공부했다. 4살쯤 아버지에게 나침반을 받고 거기에 매료도니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는 오랫동안 파고들고 사색하는 것을 즐겼다. 그의 아인슈타인에게 질색한 사람들은 교사들이었다. 교사들은 신속하고 자동적인 대답을 선호했다(지금의 한국 교사들처럼). 아인슈타인은 기계적인 암기와 가혹한 규율을 ‘프로이센 군대의 방식’이라고 혹평했다.
아인슈타인은 (교사 앞에서 입 다물고 듣기보다) 친구와 대화하면서 공부하는 것을 즐겼다. 아인슈타인은 10살 때 좋은 친구를 만났다. 탈무트라는 젊은 의학도였다. 아인슈타인의 가족은 정통 유대교의 규례를 실천하진 않았어도 관습에 따라 가난한 학자나 음식을 제공했다. 매주 탈무트를 초대해 식사를 했다.
탈무트는 아인슈타인에게 칸트의 저서와 기하학 교과서, 생물학과 물리학에 관한 21권짜리 총서를 가져다줬다. 그 중에는 빛의 속도에 대한 탐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탈무트는 그에게 아인슈타인의 평생 추구할 가장 중요한 ‘흥미거리’를 제공한 셈이었다.
아인슈타인은 ‘형’이 건넨 책을 열심히 읽었고, 얼마 안 가 수학에서 탈무트를 능가했다. 교사나 교수의 강압적인 교수법과는 다른. 놀이하듯 주고받는 문답을 즐겼던 듯하다.
‘정식 교사’가 보기에 그는 문제거리였다. 그리스어 교사 데센하트라는 인물은 아인슈타인에게 “평생 쓸모있는 사람이 못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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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도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걸핏하면 수업을 빼먹었다. 한번은 물리학 시험 과제에 대한 지시문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자기 방식대로 과제를 하고 싶어서였다. 그는 자기만의 생각을 방해받는 것을 싫어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어린아이 같았다. 마음에 썩 들지 않으면 교수에게도 경멸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그는 물리학자 하인리히 베버 교수에게 “교수님”보다는 “베버 씨”라고 편하게 불렀다. - 그는 졸업생 중에서 유일하게 일자리를 제의받지 못했다.
그의 외모는 다섯 살 장난꾸러기 같았다. 옷은 헐렁했고 구두끈은 늘 풀려있었다. 머리는 빗질이 안 된 상태이기 마련이었고, 겨울에는 양말을 안 신었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차림에 나름의 자부심이 있는 듯해 보였다.
“내가 차림새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면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닐 것.”
운전도 하지 않았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한 22년 동안 집에서 연구실까지 1.5킬로미터 남짓한 거리를 걸어 다녔다. 그러면서도 가끔 (너무 자기 생각에 몰입해서인지) 집으로 가는 길을 까먹었다. 하루는 퇴근하겠다고 나간 후 프린스턴 대학교의 고등연구소에 전화를 걸어서 말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세요. 우리 집이 어디 있는지 잊어버렸소. 집 주소를 알려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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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처럼 내가 좋으면 남들도 좋아할 거란 생각은 지천명의 나이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세 여자를 연구실에 초대했다. 점심을 같이 먹자는 것이었다. 여자들은 연구실에서 들어가 세 번 놀랐다. ‘교수님’의 머리카락이 봉두난발이었다는 것. 두 번째는 연구실에 책과 종이가 마구 어질러져 있었다는 것. 세 번째는 점심 메뉴였다. 한 여자가 이렇게 증언했다.
“휴대용 스토브에 콩통조림 네 개를 데우더니 숟가락을 하나씩 꽂았어요. 그게 점심이었어요.”
아인슈타인은 죽기 3년 전인 1952년 가을에 이스라엘 대통령직을 제의받았다. 그는 사양했다.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어린아이 같은 삶을 방해받지 않아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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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런 삶의 태도를 유지한 데는 ‘증후군’이 원인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그는 아스퍼거 증후군을 보이는 아이들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폐증과 유사한 증세를 아스퍼거 증후군은 자폐증 아이가 반복적인 루틴에 빠져드는 것과 달리 수학 문제 같은 복잡한 문제를 푸는데 몰입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아인슈타인은 말이 늦었다. 입을 뗐을 때도 혼잣말로 같은 문장을 되풀이했다. 하녀는 그를 멍청이라고 불렀다. 폭발하기 쉬운 성격이었다는 증언 역시 그가 아스퍼거 증후군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펙트다. 그는 화가 나면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물건을 던졌다. 다섯 살 때는 가정 교사에게 의자를 던졌다.
게다가 늘 외톨이에다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 그의 하루일과였다. 아버지에게 받은 나침반에 매료된 것도 이런 성향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다.
학교에서 제 나름의 공부 방식에 집착한 것 역시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발견한 한스 아스페르거(1906~1980)는 이 증후군을 보이는 아이들은 학습의 기계적인 측면을 어려워한다고 설명했다. 평범한 관심에서 한참 동떨어진 자기의 생각을 따라간다는 것. 교수의 과제 방식이나 수업을 경멸하는 태도 역시 아스퍼거 증후군의 전형적은 증상이라고 지적했다.
아인슈타인은 소통에서 문제를 겪었다. 그의 동료는 증언했다.
“사람들과 관계 맺고 소통하는 법을 전혀 모른다.”
그는 인간의 감정을 다루는 것보다 물리학 문제를 푸는 것을 편안하게 느꼈다. 그의 관계 능력 부족에 가장 큰 고통을 겪은 이들은 그의 ‘아내들’이었다. 그는 두 번째 아내에게 “모든 사적 관계를 포기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말로 함부로 걸지 말고 그의 요청이 있으면 즉시 침실이나 서재에게 나갈 것 등이었다. 두 번째 아내(밀레바)와 이혼한 후 몇 달 만에 엘자에 결혼했다. 다행히 엘자는 모든 것을 이해해줬다.
그를 둘러싼 학자들도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그는 예리한 지력의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산만했다. 강연 중에도 딴 데 정신이 팔려있기 일쑤였고, 강의 내용에 있어서도 서로 상관없는 내용을 연결시켜 청중을 헷갈리게 하기도 했다.
그의 초상화를 그린 울프라는 화가의 증언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는 이야기하면서도 계속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눈길이 향한 대상을 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방안에 혼자 있는 것처럼 종이에 메모하는데 몰두하기도 했다.
“그에게 나는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말을 거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의 사유방식도 독특했다. 그는 단어와 문장이 아닌 글로 사고했다. 그의 상대성 이론 역시 그림에 기반해 아이디어를 구체화했다. 이를테면, 스위스 베른에서 특허청 심사관으로 일할 때 상대성이론에 대한 영감을 시계탑에서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빛의 속도로 시계탑에서 멀어지면 전차 안에 걸린 시계를 생각했다. 시계는 정상적으로 째깍거리며 돌아갈 거였다. 그 이미지를 떠올린 순간 “내 마음 속에서 폭풍이 일어났다.”고 회상했다. 그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쓰이거나 말해지는 낱말들이나 언어는 내 사고의 메커니즘에서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낱말들로는 거의 생각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남아있을 수 없는 부분에서는 타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일상적인 실무와 사회적 관습 등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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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젊음은 아스퍼스 증후군에서 비롯되었다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그는 어린아이 같은 태도로 삶을 살았고 그것이 뇌의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었다. 증후군 따위 없다고 하더라고 그처럼 어느 부분만큼은 어린아이 같은 태도로 살아간다면 결론적으로는 비슷해지지 않을까. ‘천재’가 아니더라도 하루 24시간을 어른처럼만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참고>
클로디아 캘브, <앤디 위홀은 저장강박증이었다>, 김석희 옮김, 모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