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좋은 글귀
윤색과 퍼포먼스
정치와 외교에는 윤색과 퍼포먼스가 필수다. 의사를 전달하고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기 뭣한 순간이 많다. 게다가 모든 일을 필요에 따라 실행에 옮기기도 힘들다. 현실적인 조건들 때문이다. 때로 진의를 숨기고 포즈를 취하기도 한다.
신라가 당과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이후에도 수많은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신라는 사죄사를 보내면서 동시에 전쟁을 준비했고(트로이의 목마보다 극적인 퍼포먼스가 아닐까), 일본 역시 신라 침공 계획을 짜기도 했다. 현대 정치와 외교 못잖게 치열하고 긴박한 상황이 연출됐다.
668년 고구려가 무너졌다. 669년, 신라는 백제의 옛 땅으로 진격해서 성을 빼앗았다. 고구려는 신라와 손을 잡았다. 당이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말갈군과 북으로 진입했기 때문이었다.
신라는 한반도에 하나의 나라만 남겼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동지의 배신으로 칼을 씻을 시간도 없이 다시 피를 봐야 했다. 다행히 고구려의 유민들이 신라를 도왔다. 신라는 당과 전투를 치르면서 동시에 사죄사를 보냈다. 사과와 전쟁을 반복했다. 목숨을 걸고 국토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이어갔던 거였다.
신라의 태도는 완강했다. 나당전쟁을 이끌었던 문무왕이 죽고 신문왕이 즉위하자 당은 사신을 보냈다. 681년의 일로, 당은 신문왕을 신라왕으로 책봉했다. 신라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사은사를 보내지 않았던 거였다. 686년 당 고종이 죽고 중종이 즉위했을 때도 축하 인사를 하지 않았다. 같은 해 측천무후가 주나라를 건국했다. 이를 계기로 신라는 견사를 보냈다. 당과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가 드디어 끝이 나고 있었다.
그 사이 신라가 주목한 세력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백촌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패하면서 신라와 적대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신라가 내미는 손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신라는 다급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발해가 전국하기 직전인 697년까지 신라가 25회, 일본이 11회, 총 36회의 사신이 오간다. 사신이 이웃집 드나들듯 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다만 일본은 당시의 기록을 상세하게 남겼지만 <삼국사기>엔 기록이 거의 없다. 그저 670년 왜가 일본으로 나라 이름을 바꾸었다는 언급이 거의 전부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필요에 의해 사신을 주고받았을 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일본은 의미가 각별했다. 두 나라 사이에 사신이 한창 오가던 중이던 681년 덴무 천황이 “옛 기록들을 모두 정리해 새로이 만들라”는 명을 내렸다. <고사기>(712년)와 <일본서기>(720년)이 완성된 배경이었다. <일본서기> 대외적으로 일본을 알리기 위해 순수 한문체를 썼다.
당시 신라가 급박한 상황에서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일본의 인식이 <일본서기>안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진구황후’로 알려져 있는 일본의 신라 식민지설이었다. 일본은 신라 사신들에게 ‘종전의 관례’를 운운하며 신라를 속국처럼 하대하는 행태를 보였다. 이들은 신라가 가져온 물품들을 조(調) 혹은 공물(貢物)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원정군의 패배 등에서 비롯된 7세기 말의 대외 위기를 극복하고 율령을 반포(701년)한 이후 율령국가로서 자신감을 얻은 일본의 위상을 과시하려는 전략이었다. 율령 반포 이후 스스로를 소중화로 생각하면서 타국의 사신을 번국 취급을 한 것이었다. 동시에 외부에 강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내부를 결속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
성덕왕(재위 702∼737)이 즉위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우선 당나라와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일본에 대해서도 엄정한 분위기를 되찾았다.
신라 입장에서는 더 이상 막나가는 일본을 두고 볼 순 없었다. 722년, 신라는 일본적로(敵路)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모벌군(경주 지역)에 성을 쌓았다. 9년 뒤(731년)에는 동해에 나타난 일본배 300척을 대파시켰다.
변수가 등장했다. 발해였다. 발해는 당과 책봉 관계를 맺었지만 얼마 안 가 틀어졌다. 당이 흑수말갈을 끌어들여서 작위를 주고 발해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발해로서는 묵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발해는 당과의 일전까지 각오했다. 732년, 당이 유주 일대를 장악하면서 발해는 코앞에서 당군과 대치하는 상황까지 갔다. 그해 9월 발해는 당을 선제 공격했다. 발해는 당과 신라 사이도 이간질시키기 시작했다. 신라에게 당의 배후를 공격하라고 요구했다.
이 상황에서 마두산 전투가 벌어졌다. 당이 거란을 공격하자, 발해가 득달같이 달려가 당을 향해 칼을 휘두른 사건이었다.
당과 대립하는 발해, 신라가 죽도록 싫은 일본. 연결고리가 생겼다. 720년 일본에 발해에 사신을 보냈다. 발해는 727년에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다.
일본으로서는 감격 그 자체였다. 고분고분하던 신라가 갑자기 돌변한 마당에 담비 가죽 같은 귀한 토산물을 들고 열도를 방문한 발해가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조나 공물 같은 표현을 쓰지 않았다. 발해와 일본 모두 국서를 모두 교서(敎書)라고 칭했고, 선물에 관해선 발해는 ‘신물(信物)’로, 일본은 방물(方物)로 썼다.
무언가를 보여주기보다는 발해와 함께 도모할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신라 침공이었다. 일본 내 신라정벌에 대한 첫 논의는 737년이었다. 2년 전 사신으로 온 김상정이 신라를 왕성국이라 칭해서 일본 속을 뒤집어 놓았고, 이듬해 4월에 일본에서 보낸 사신을 거절했다.
잠깐 관계 회복의 기미가 보였다. 750년, 신라 왕자 김태렴이 700여명의 사신단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은 귀빈 앞에서 신공황후를 운운하면서 사신단을 질책했다. 3년 뒤 일본이 사신을 보냈지만 신라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759년 6월, 신라 침공 계획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발해를 통해 안사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불온한 세력이 쳐들어올 수도 있다는 불안이 조성된 거였다. 3년 안에 선박 500척을 마련한다는 목표를 세웠고, 미노국과 무사시국의 소년들에게 신라어를 가르쳤다. 762년에는 가시이 묘에 제물을 바치고 군사 훈련을 고했다. 가시이 묘는 진구황후의 신사였다.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왜 신라 침공이 실행되지 않았을까?
애당초 큰 뜻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호들갑은 내부 사정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 침공 계획을 주도한 후지나와 나카마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쥰닌 천황의 태자 즉위를 도운 공으로 자기 마음대로 국정을 휘둘렀다. 불만 세력들이 뭉쳐서 난을 일으키자 이를 제압했지만, 상황이 계속 나빠졌다. 상황(上皇) 고켄천황이 아직 건재했고 자신을 지지하던 고묘황후는 점점 쇠약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 침공 퍼포먼스는 내부 결속력을 다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외부 위기 조성으로 내부를 안정시킨다는 전략이었다. 신라 침공 퍼포먼스는 763년초에 끝났다.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일본이 정말 신라를 향해 진격했다면 발해는 일본과 손을 잡았을까? 그랬을 가능성은 없었다. 일본을 통해 국제적 지위를 인정받는데서 만족했을 것이었다. 신라를 건드린다면 당과 힘겨운 싸움을 계속해야 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당과의 관계도 호전되고 있었다. 섬나라 하나 때문에 피비린내를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 발해도 일본의 속사정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을 것이다. 서로 알면서도 모르는 척, 연극을 했던 거였다.
역사 윤색에 이은 군사 퍼포먼스는 결국 실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위험한 짓이었다. 이후의 역사에서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거나 황당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적어도 두번 이상 위험한 장난을 했다. 아시아 전체를 혼란에 빠트렸다.
이들의 퍼포먼스는 천성인 듯하다. 최근에도 북한이 조성한 긴장과 관련해 다양한 퍼포먼스를 펼쳤다. 정치적 목적이 무엇인지 또렷하게 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위험한다. 말더듬이 흉내를 내다가 말을 더듬게 되듯, 언제고 퍼포먼스는 현실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개헌이 우려스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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