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긴 이야기
‘거대 열광증(gigantomania)’
1986년 4월 26일. 세계를 충격에 빠트린 일이 터졌다. 체르노빌 원자로 4호기 폭발사고.
일반적으로 이 사건은 ‘원자로가 적절하게 차폐되어 있지 않았고, 오래된 원자로를 계속 사용했으며, 감독하는 이들의 교육 수준이 낮고 안전 불감증이 심각했던 데 원인이 있다’고 알려졌다.
너무 간단하다. 체르노빌의 비극을 소련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시스템과 관련시켜 설명하려는 목소리가 있다. 그들이 오랫동안 견지해온 세계에 대한 태도, 그에서 비롯된 교육과 경제 정책의 결과가 그러한 파국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그와 비슷한 대형사고들이 줄을 이었다. 이를테면 핵 잠수함과 관련된 사고를 비롯해 철도 등 운송 관련 사고, 환경 재난 등 크고 작은 사태가 연이어 터졌다.
변호사 출신인 고르바초프(1931.3.2 ~ )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인간 요소’를 들었다. 그는 기술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를테면 단순한 기술적 이해를 넘어서 경제, 안전, 노동조건, 환경위험, 심리, 사회요소를 고려한 새로운 기술 혹은 산업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꿰뚫었다. 고르바초프는 경제학자와 사회학자, 혹은 역사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해 정책을 수립했다.
그의 발언은 소련이 오랫동안 지워버리려 했던 오래된 ‘엔지니어’ 한명을 불러왔다. 표트르 팔친스키(1875~1929). 그는 스탈린 시대의 기술자로 사회적 요소를 무시한 협소한 기술 교육과 산업 시스템을 비판했었다.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 초는 소련이 가장 신바람 나는 시기였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세계를 휩쓴 까닭이었다. 공산주의의 추월이 확실해 보였다. 그들은 계획을 세워서 경제를 개발했다.
드네프르강에 건설된 세계 최대 수력 발전소.
서시베리아 마그니코고르스크에 세워진 세계 최대 제철소.
발트해와 백해를 잇는 배해 운하.
문제는 이 계획에 인간에 관한 요소가 극히 미미했다는 점이었다. 많은 이들이 죽었다.
스탈린은 거대한 철강 공단도 계획했다. 팔친스키는 보다 꼼꼼한 조사와 검토 후 부지 선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권력자들은 거침이 없었다. 그들은 밀어붙였다. ‘세계최대’라는 타이틀만 얻을 수 있다면 ‘자잘한 사항’은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노동자들의 숙소나 생활환경은 완전 무시에 가까웠다. 정부는 “새로운 제철소가 최신 시설을 갖추고 규모와 품질에서 서구 경쟁 업체들을 압도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팔친스키의 생각과 완전히 달랐다. 팔친스키는 엔지니어링 의사 결정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간’이라고 주장했다. 기술적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노동자의 사회적, 경제적 필요를 채워지지 못하면 높은 생산성이나 성공적인 산업화는 불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기계가 훌륭해도 노동자의 교육수준이 낮으면 기계를 고철로 만들 것이었다. 적절한 수준의 지적 능력과 함께 일에 대한 의욕이나 흥미, 혹은 성취감이 반드시 필요했다. 자기주도적 노동이 산업을 살린다고 본 것이었다. 요컨대, 좋은 교육, 좋은 대우, 일에 대한 흥미가 생산성과 발전을 결정한다고 했다.
“인간에 대한 관심이 “다른 어떤 것보다 큰 결과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는 러시아 산업 재건과 학장은 권력자들의 강제, 혹은 외국 기술 수입이 아니라 ‘내부 혁신’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주목할 만한 발언을 남겼다.
‘세계는 전 인류를 위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소련은 팔친스키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그들은 세세한 조건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중요시했다. 이를테면 거대한 발전소나 공장을 세워 소련의 위용을 자랑하고 싶어했다. 서구의 논자들은 소련이 ‘거대 열광증(gigantomania)’에 사로잡혔다고 비꼬았다.
팔친스키는 말했다. “규모 자체는 미덕이 될 수 없다”고. - 기술 훔치기에다 거대 열광증에 사로잡힌 몇몇 신흥 국가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더군다나 소련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말로를 기억한다면.
스탈린은 결과론자였다. 그는 인간이든 사회든 관심 없었다. 거대한 결과물만 눈에 보이면 그만이었다. 그는 말했다.
“기술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1차 5계년 계획은 1927년에 시작되었다. 팔친스키와 그의 동료들의 조언은 깨끗하게 무시했다. 권력자들의 입장에서는 심플하게 앞으로 치고 나가면서 ‘하면 된다’ 같은 구호로 덮어버리면 그만일 거였다. 교육, 노동자의 의욕, 합리적인 원칙, 장기적 계획 같은 말들은 모두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그들의 자신감은 1920년대와 30년대 초에 절정에 달했다.
정상적으로 사고했던 기술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권력을 이길 수 없었다. 팔친스키가 그러했던 것처럼 언제 끌려가서 총상을 당할지 몰랐다. 그들은 숨었다. ‘말썽’을 피하고 그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최선이었다. 성과(생산량 증대)지표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연구소에 배정되면 최고의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미국 역사학자들은 엔지니어들의 이러한 태도를 ‘생산으로부터의 도주’라고 명명했다.
서구의 기술자 한명이 1960년대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그는 거기서 자신이 엔지니어라고 밝힌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자신을 ‘제지 공장용 볼 베어링’ 엔지니어라고 했다. 학위 이름도 그와 같았다. 그것 이외의 지식은 거의 없었다.
교육의 범위가 좁았다. 일찍부터 전문 분야에 파고 들어서 전체적인 지식이 부족했다. 그 당시 소련 교육의 권위자 니콜라스 다윗은 말했다.
“소련이 전문화는 세계 어디보다 확연하게 구분되어 있다.”
그는 90년대 무렵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하면서 소련의 엔지니어링 분야에서 전공 분야 급증했고, 기술이 거의 파편화되었다고 말했다.
인문학 교육은 제로에 가까웠다. 물론 정치와 경제를 배웠다. 하지만 ‘질문’이 필요 없는 주입식이었고, 그 폭이 지나치게 좁았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주입받았다. 사회와 경제, 산업의 복잡한 상호작용과 주요 경제 이론가들의 사상을 탐구하는 기회는 없었다. 기술자들이 일하게 될 경제 환경도 지나치게 단순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기업과 국유기업, 노동자와 경영진이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조화를 이루어가는 과저잉 아니라, 그들은 그저 거대 공장의 구성원으로 들어가 시키는 대로 자기 일만 하면 그만이었다. 완벽한 부속에 가까웠다.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다. 스탈린의 아이들은 60년대와 70년대 공산당 전부 고위직에 포진된다. 1955년에서 1986년 사이 기술자 출신 비율은 59%에서 89%까지 급증했다.
팔친스키가 우려한 상황이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대규모 기업만 즐비했고, 자원 투자, 환경, 사회 비용에 무지한 경영진들이 기업을 이끌었다. 그들은 행정과 경제, 정치, 혹은 사회학이나 심리학에는 무지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체르노빌’ 발전소가 건설되고 운영된 것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론이었다.
소련은 하나의 샘플이자 가장 훌륭한 교훈이다. 보다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는 국가나 공동체는 으레 소련이 걸었던 길, 혹은 체르노빌 사태 같은 최악의 상황에 맞닥뜨리기 마련이다. 인종과 국적, 시대를 초월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 실패의 과정을 여실하게 보여줬음에도 여전히 소련의 길을 가고 있는 나라들이 눈에 띈다. 그 환상이 언제쯤 혹은 누군가에 의해 부셔질지 궁금하다.
* 표트르 팔친스키(1875~1929). 러시아의 광산학자. 소비에트연방 초창기 기술·산업 정책을 이끌었던 엔지니어. 팔친스키는 노동 조건이나 지역 조건을 중시하는 정책을 주창했지만, 소련 정부는 ‘포드주의’나 ‘테일러주의’ 같은 미국식 경영기법을 받아들여 중앙정부 주도의 거대 규모의 산업시설을 건설에만 골몰했다.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백해 운하, 마그니토고르스크의 거대 철강단지 등이 그렇게 건설됐다. 1929년, 팔친스키는 쿠데타를 꾀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비밀리에 처형됐다.
참고>
로렌 R. 그레이엄 지음, 최형섭 옮김,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역사인,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