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BTS 중국

짱구는옷말려요 2020. 11. 22. 13:42

 

BTS가 어쨌다고?

 

“올해는 한국전쟁 70주년으로 양국(our two nations, 한·미)이 함께 겪었던 고난의 역사와 많은 남성과 여성의 희생을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

 

 

 


BTS가 2020 밴 플리트상(2020 Van Fleet Award) 수상식에서 밝힌 소감의 일부다. 중국 누리꾼들이 뒤늦게 발끈했다. 중국의 반응은 즉각 세계적인 이슈가 됐다.

 


“BTS는 한국전쟁 희생자들을 기렸지만, 일부 중국인은 (BTS 발언에서) 모욕을 느꼈다... 그것(BTS 수상 소감)은 악의 없는 말 같았다. 하지만 중국의 인터넷 사용자들은 지체 없이 (BTS를) 공격하는 글을 올렸다.” - 뉴욕타임스(NYT)

 

 

 


“이번 논란은 세계 제2위 경제 대국인 중국에서 대형 업체들 앞에 정치적 지뢰가 깔려 있다는 것을 보여준 가장 최근의 사례” - 로이터통신

 


“중국에 진출한 외국 브랜드가 중국의 편협한 민족주의에 희생된 최신 사례가 발생했다. 아직 한한령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가운데 BTS 사건까지 터져 한국 기업들이 노심초사하고 있다” - 파이낸셜타임스(FT)

 


전부는 아니겠지만 중화에 젖은 중국인들이 내놓은 발언은 과하다. 그나마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높아서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든다. 중국이 한국 문제에 깊이 개입한 건 오래된 일이다.

 

 

 


‘기쁜 날 기쁜 날 / 우리나라 독립한 날

우리나라 독립한 날 / 일월같이 빛나도다

기쁜 날 기쁜 날 / 우리나라 독립한 날’

 


‘독립가’의 후렴부다. 언제 불려진 노래일까. ‘우리나라가 독립한 날’이라고 하면 1945년 8월 15일을 떠올리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 노래가 불린 날은 1896년 11월 21일이었다. 이날 독립문 정초식이 있었다.

 


5개월 전, 독립신문에 이런 논설이 실렸다.

 


‘모화관에 이왕 연주문(영은문의 다른 이름) 있던 자리에다가 새로 문을 세우되 그 문 이름은 독립문이라고 하고 새로 문을 그 자리에서 세우는 뜻은 세계 만국에 조선이 아주 독립국이란 표를 보이자는 뜻이요. 이왕에 거기 섰던 연주문은 조선 사기(士氣)에 제일 수치 되는 일인즉, 그 수치를 씻으려면 다만 그 문만 헐어버릴 뿐이 아니라 그 문 섰던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는 것이 다만 이왕 수치를 씻을 뿐이 아니라 새로 독립하는 주추를 세우는 것이니...’ - 1896년 6월 20일 ‘독립신문’ 논설.

 

 

 


일제강점기 36년에서 풀려난 것은 훤하게 기억해도 우리 조상들이 일제로부터의 독립 이전에 이미 감격적인 독립을 맞은 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독립이 있으려면 ‘강점’ 혹은 그에 준하는 속박이 있어어야 한다. 조선인들이 독립이 훼손되었다고 느낀 사건은 임오군란이었다.

 

 

 


1882년(고종19) 6월9일 일어난 이 사건은 구식군대가 일으킨 병란이었다. 대원군은 자신을 찾아온 구식군대를 두둔하는 척하며 이들을 활용해 척촉인 민씨를 밀어냈다. 그는1876년(고종13)의 강화도조약으로 대원군이 취한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권력도 아들에게 물려준 상황이었고, 이를 병란을 활용해 보기 좋게 뒤집은 것이었다.

 


왕비와 민씨 세력이 손놓고 있지 않았다. 이들은 청나라에 도움 요청했고, 조선에 들어온 청나가 군인 3,000명이 군란을 진압했다. 대원군의 컴백도 얼마 안 가 무위로 돌아갔다.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깊숙이 관여했고 1882년에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조선을 청의 속방으로 명기한 불평등 조약으로 이 장정으로 청 상인의 경제적 침투가 본격화되기도 했다. 임오군란은 기점으로 청은 조선을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속국으로 만들었다.

 


이전에도 속국이라는 표현이 등장했지만 한반도는 한번도 독립국으로서의 자주성을 잃은 적이 없었다. 원, 명, 청에게 한반도는 특수 지역으로 황제가 직접 한반도를 지배하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자주성이 있었다. 조공 잘 바치고 신하국의 예를 잘 따르면 그만, 독립성을 훼손당하진 않았다.

 


조선 사람들이 ‘독립’을 갈구하던 이 시기, 조선 주재 미국 공사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와 조선 관리 사이에 의미심장한 대화가 오갔다. 1887년 5월의 일이었다. 딘스모어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독판인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을 만나 조선과 청의 관계를 물었다. 그러자 김윤식은 이렇게 대답했다.

 


“조선은 진정한 독립왕국이오. 그러나 약소국이므로 청에 자문하고 지원을 요청한 것뿐이오... 조선인들은 조선의 왕이 있소. 청의 황제는 청국인들의 황제일뿐이오!”

 


딘스 모어는 그를 통해 독립 의지를 확인했다고 회고했다. 여기서 ‘독립’은 ‘독립문’을 세운 그 독립, 즉 청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요컨대, 조선은 이전에도 ‘속국’이라는 굴레를 썼지만 그것은 독립국의 지위를 잃는 의미가 아니었다. 내정을 좌지우지하는 정도의 간섭은 없었다. 내정 간섭이 심한 상황이 조선인들은 이를 독립을 상실한 상태로 인식했다. 거칠게 말하면 속국의 의미는 약소국들이 강대국의 눈치를 보는 상황 정도로 해석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강대국들이 군대 파견을 요청하면 웬만하면 거절하기 힘들다. 전후 교역이나 외교에서 왕따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군대를 파견한다고 해서 독립국의 지위를 잃는 것도 아니다.

 

 

 


청일전쟁(1894년 7월 ~ 1895년 4월)으로 청나라 ‘속방’의 상태는 끝이 났다. ‘독립국’의 지위를 다시 회복했다. (독립문은 1897년 11월 20일에 완성되었다.)

 


일제강점기에도 독립문은 파괴되거나 수난을 당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제는 1928년에 4,000원을 들여 대대적으로 수리를 했고, 1936년에는 고적 제85호로 제정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독립이 청으로부터의 독립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본은 전쟁으로 이 독립에 기여했다. 이런 인식은 1919년 ‘2.8 독립선언문’에도 스며 있다.

 


‘일본은 조선이 일본과 순치의 관계가 있음을 깨닫고 1895년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앞장서 승인하였고...’

 


그러나 일본의 기대와 달리 ‘독립문’은 이후 항일 독립의 상징으로 진화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군가’에는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 싸우러 나아가세’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또한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제작한 달력에는 광복 후의 상상도가 등장한다. 그림에는 독립문이 개선문처럼 묘사되어 있었다.

 


지금은 독립문에서 청나라의 흔적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 내리면 ‘기미독립선언서’가 새겨진 화강암 부조물을 볼 수 있다. 청나라의 독립을 계기로 세워진 문이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대부분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연상한다.

 

 

 


독립문에 또 다른 독립의 의미가 덧씌워진 적이 있었다. 바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년, 독립문에는 ‘대한민국 독립 1주년 기념’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내걸렸다. 미군정 3년이 끝나고 자치국 정부로 홀로섰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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