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족보 찾기

짱구는옷말려요 2020. 10. 31. 16:56

권씨 족보에 권씨는 10%

 

 

 

 


양반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다. 당연히 특권층이었고, 고려 후기로 가면서 이 특권을 획득하려는 경쟁이 치열했다. 조상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열된 호적은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호적에 변화가 찾아왔다. 조선 건국 직후까지만 해도 그대로 가다가 이후로 양반 부부 각각의 사조(四祖ㆍ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까지만 기록하도록 했다. 이에 ‘뼈대’를 보여주고 싶었던 양반들은 불만을 가졌다.

 

 

 


15세기 후반, 민간 족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첫 ‘작품’은 안동권씨성화보였다. 이 속에는 아버지 혈통과 딸들(사위)까지 포함됐다. 범위가 방대해서 심지어 권씨족보였지만, 족보에 담긴 ‘권씨’ 성 남자는 10%에 불과했다. 성씨가 수백 개에 이르렀다. 아버지와 아들로 이어져 내려오는 족보라기보다 일종의 혼맥지도였다.

 

 

 


혼인은 곧 동등한 신분이라는 증거였다. 이 족보를 통해 성씨가 다른 여러 가족이 신분적으로 한 울타리 안에 들어갔다.

 


이는 정부에서 ‘신분’ 증명을 소홀히 하자 민간에서 스스로 사회적 권위를 세운 셈이었다. 혼맥이 활용된 것은 족보의 엘리트주의와 함께 혼맥을 통해 엘리트의 영역을 넓히는 개방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조선의 양반은 법적으로 보장받는 신분이 아니었다. 사회적인 인정과 권위에 바탕을 둔 사회적 신분이었다.

 


17세기 들어 아버지와 아들로 이어지는 족보의 특성이 강화되지만 사위 대신 장인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으로 변화가 있었을 뿐이었다. 혼인 네트워크를 증명하는 서류로서의 기능은 변함이 없었다. 이들은 여전히 혼맥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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