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포로
그들은 왜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나
피해갈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난하든 부하든, 권력이 있든 권력이 없든.
병자호란에서는 포로들이 그런 처지였다. 가난하든 부하든, 권력자든 아니든 패배한 나라의 백성이라는 이유 하나는 같았다. 무작위로 끌려갔다.
이들은 심양의 노예시장에서 매매됐다. 얼마 후 청나라 왕은 조선인들의 속환을 허락했다. 심양이 몇 십 만이나 되는 사람을 한꺼번에 수용할 만큼 크지 못했다.
조선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얻었으나 이때 문제가 생겼다. 조정에서 나서기 전에 이미 속환을 해버린 사람들이 있었다. 사대부 혈통을 가진 이들이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이들이 너무 많은 돈을 내고 데려가 버리는 바람에 포로들의 몸값이 올라버렸다.
당시 시골 하루 품삯이 5냥, 사대부 중에는 1,500냥까지 돈을 내고 데려간 이도 있었다. 최명길은 속환 비용을 100냥 이상 쓰지 못하도록 하자고 건의했다. 임금은 승인했으나 청나라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협상은 결렬됐다. 결국 속환비용은 ‘시장’에 맡기기로 했다. 그 결과 여성의 2/3가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돈과 권력이 있으면 같은 상황에서 다른 대처를 할 수 있다. 병역이나 관공사 사업에서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나라가 정한 공정한 기준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보고 있자면 사대부들의 조급함에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조선 포로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참고>
전규호, <조선시대에는 노비도 초서를 썼다>, 명문당,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