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토지제도
개혁
생산 시설과 근로자. 무언가를 생산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다.
고려시대에는 토지와 농부였다. 열심히 일해서 세금 열심히 내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권력자들의 욕망만 없었다면. ‘대동야사’란 야사집에 이런 기록이 전한다.
‘파주의 서교는 황폐하여 사람이 살지 않았다. 정당 안목이 처음으로 이를 개간하여 널리 전무(田畝)를 경작하고 크게 집을 지어 거주하였다... 그 손자 안원에 이르러 극성하여 안팎으로 토지를 점유한 것이 무려 수만 경이었으며, 노비는 백여 호였다.’
사전은 왕이 국가나 왕실에 훈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특별히 하사하는 토지였다. 일반 백성들이 여기에 들어가면 두 가지가 변했다. 국가에 세금이나 부역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신분이 하락했다. 소작인에서 대부분 노비로 전락했다. 권력자들은 노비와 양인을 혼인시켜 노비를 만들고 나라에 낼 세금을 떼먹은 이들을 적극 받아들였다. 조세 포탈자들의 소굴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 이유였다.
국가를 경영하는 입장에서는 혁파가 필요했다. 생산에는 토지와 근로자 모두가 필요했지만 일단은 토지 제도부터 바꾸기로 했다. 공양왕 2년에 기존의 토지문서를 모두 불사르고 다음해에 과전법을 공포했다.
절반의 성공? 일을 했으니 나름의 성과가 있은 것도 사실이나 절반만큼도 성공을 못 했다. 어떤 이들은 이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바로 전장에 소속된 노비들이었다.
과전법이 제정된 다섯 달 후에 이런 상소가 올라왔다.
‘다만 민구(民口)를 소유하는데 본래 제한이 없고 또한 이를 사재(私財)라고 일컬으며 쟁송하는 것이 토지를 다루던 폐단보다 심한 점이 있습니다.’ - 고려사 권85, 지39, 형법2, 소송, 공양왕 3년 10월.
농민들은 권력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노동력 확보에 혈안이 된 권력자들은 생각이 정반대였다. 노비를 두고 네 것, 내 것 다투는 것도 심해졌다. 토지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는 것보다 더 심하다는 것이었다.
‘오직 노비 한 가지 일만이 아직도 옛 제도를 따르고 있어 쟁송이 더욱 번잡해지고 간사함과 거짓이 날로 더해져서, 골육지친이 입을 삐죽거리고 서로 힐난하며, 문중이 갈라지고 집안이 나누어져서 증오가 원수가 같을 뿐 아니라, 더구나 그 외에 빼앗고 몰래 취하는 것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 태조실록, 권8, 태조 4년 11월
토지처럼 노비도 단박에? 그럴 수는 없었다. 사전 혁파에서 1차 피해를 입은 ‘있는 집안’들이 노비까지 건드린다면 막 시작하는 새 왕조에 큰 부담을 줄 수도 있었다. 좋게 넘어가야 할 상황이었다.
신분에 대한 차별적 사고는 여전했고, 노비를 양인과 결혼시켜 노비를 확장하는 경향이 계속됐다. 다만, 고려에는 노비와 양민이 결혼하면 무조건 자식들이 노비가 되었는데, 조선에서는 아버지가 노비일 경우 노비가 된다고 정했다.
조선은 신분이 분명하지 않을 때 양인 신분을 인정하면서 그들을 특수한 직임에 충당하는 방법을 쓰기도 해지만 큰 효과는 없었고, 절에 있는 노비를 대거 속공하는 등의 방법을 동원했다.
빠른 게 좋을까, 시간이 걸리더라도 보다 큰 효과를 내는 게 좋을까. 혹은 누군가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절반의 성공이라도 시도해야 하는 걸까, 고루 혜택이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걸까. 개혁에 대한 고민은 지금도 여전하다. 다 좋아지게 하려고 개혁했으나 결국 소리만 요란한 경우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참고>
정요근 외, <고려에서 조선으로>, 역사비평사,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