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만인소 사건
구한말 의병의 뿌리를 찾아서
1881년, ‘척사만인소’운동이 일어났다. 영남지역의 선비들이 중심이었다. 이 척사운동은 언로 운동에서 무력부분으로 번졌다. 의병을 조직하고 조직적으로 무력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척사만인소’의 시작은 영남이었으나 의병 운동은 다른 지역, 다양한 학파에서도 뛰어들었다. 계몽운동과 공자교 운동, 유림단 사건을 거쳐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으로 발전했다.
이들의 출발점에는 1792년(정조 16)에 첫선을 보인 ‘만인소’가 있었다. 만인소의 바탕은 ‘공론에 의한 정치’ 추구였다. 조선시대는 왕이 다양한 의견을 들은 후 정책을 보장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고, 관료가 아닌 유생들에게도 국가 정책에 대해 말할 자격을 부였다. 그들은 “인심이 동의하는 바를 공론이라 하고, 공론이 있는 바를 국시國是라고 한다.”는데 동의했다.
만인소를 올리는 사람의 의식 속에는 위정(衛正)이라는 단어가 박혀 있었다. 이는 위도주의와 상통한다. 유학의 도인 근본 이치를 지키면 현실적인 문제(氣)는 저절로 따라온다는 생각이었다. 이른바 주리론적 관점이었다.
‘위도주의’에 입각해 유생들은 여러 가지를 지키려 했다. 명나라가 망하자 ‘중화의 정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소중화론을 내세웠고, 구한말에는 나라(조선)이 말해도 유학의 도는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들은 유학의 도를 잘 지키고 있으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때 그러한 이념을 실현시킬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1871년, 서원을 지키려고 작성한 만인소에서 그들의 지키고자 하는 마음의 각오를 엿볼 수 있다.
‘이제 전하께서 이단을 힘써 물리쳐 군주와 어버이에 대한 도리를 멸시하고 강상윤리를 싫어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천지간에 발붙일 데가 없게 한다 해도 바다를 건너오는 저 오랑캐들의 침략을 받는 우환을 당할 빈틈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 유학의 기풍을 없애 버린다면 나라의 원기(元氣)가 흩어지고 사기(邪氣)가 그 빈자리를 타고 들어오게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만인소’ 활동의 뿌리에는 퇴계학이 있었다. 1792년 영남에서 최초의 만인소가 일어났을 때, 남인들이 겨냥한 것은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기호노론이었다. 이들의 눈에 기호노론은 도덕적 원리를 따라 실천하는 건전한 세력이 아니었다. 물론 율곡학이 도덕을 짓뭉갠 것은 아니었다. 다만 퇴계학을 이은 이들이 이를 더 강조한 측면이 있었다.
퇴계학은 형이상학에 집중한 주자학에 비해 윤리적인 부분을 중시한 가치철학이었다. 주자가 이치에 대한 앎을 중시했다면 퇴계는 실천을 중요시했다. 주자학의 우주론적 경향보다 개인의 윤리와 심성론에 초점을 맞추었다.
‘한국적 주자학’이라는 명찰이 달린 퇴계학이 만들어진 가장 중요한 동기는 사림과 사화였다. 사림의 뿌리는 고려말의 온건개혁파,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길재였다. 길재는 고향에 내려가 후학을 양성했고 100년 후 이들은 중앙정계로 진출했다. ‘소학’으로 대변되는 이들은 주자학의 복잡한 이론보다는 절의정신과 실천을 중시했다. 불행하게도 이들에게는 4번의 사화가 덮쳤고, 퇴계는 이들의 삶을 끌어안고자 한국적 주자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목숨을 걸고 도학정치를 실현하려 한 이들을 기리고, 그들의 철학을 주자학 내에서 설명하려 애썼다. 이를테면, 주자학에서 우주와 사람의 형성 원리로 리(理)와 기(氣)를 제시했다면, 퇴계는 이를 선과 악의 근거로 봤다. 리는 선, 기는 악함의 가능성을 가졌다고 해석했다. 주자학의 일반적 관점과 차이가 있었다. 주자학이 존재론(형이상학)이었다면, 퇴계는 가치론(윤리학)에 가깝다. 퇴계는 도학정치를 실현하려고 애쓴 사림의 실천적 성향을 선(善)이라고 규정했다.
고려말 급격한 개혁을 반대하고 낙향한 선비들의 절개, 그들의 후학들이 추진한 다양한 실천과 시련, 그 선함을 위한 투쟁이 면면히 이어져 조선을 관통하고 항일의병까지 이어져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