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공포정치

짱구는옷말려요 2020. 6. 10. 16:38

공포정치

 

 

 

 

공포의 탄생

 


약자의 편에 선다는 말은 늘 뭉클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한 꺼풀 벗겨보면 보이는 것과 다른 경우가 많다. 오히려 심각한 왜곡을 불러오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로베스피에르(1758~1794)는 늘 소농민과 소생산자층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동생을 낳다가 죽었고, 그는 7살 때부터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는 일곱 살 이후로 아버지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공부를 꾀나 잘한 것을 제외하면 쓸쓸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마음이 여렸다. 그는 학업을 마치고 변호사가 되었다. 검사로 위촉되기도 했으나 사형을 구형하는 일이 싫어서 그만두었다. 그는 약자 편에 선 변호사로 명성을 이어갔다. 1789년 루이 16세가 삼부회를 소집했을 때 ‘제3신분’ 대표 중 하나로 파리에 간 이유였을 것이다.

 

 

 

 


알려진 대로 그는 후일 공포정치를 펼쳤다. 고대 그리스의 고전과 루소에 심취했던 그는 이상을 실현시킬 능력이 부족한 혹은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를 절제하는 미덕’이 부족한 민중들에게 우선 쓸 수 있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그것은 공포였다. 그는 공포로 방종을 짓누르고 혁명을 뒤집으려는 세력을 막으려고 했다. 요컨대 그가 보기에 민중은 아직 민주주의를 소화할 능력이 부족했고, 이에 이상을 위한 가장 이상적인 대책을 가져온 것이었다.

 


그는 ‘반혁명파 박멸’을 추진하면서 결벽에 가까운 성향을 보였다. 그는 왕(루이 16세)와 왕비의 변호인들이나 그들에 대한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은 증인들까지 죽였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인권을 억압하는 자들을 응징하는 일, 그것이 자비입니다. 그런 자들을 용서하는 일, 그것은 야만입니다. 폭군의 잔인함은 그저 잔인함일 뿐이지만, 공화국의 잔인함은 미덕입니다.”

 

 

 


로베스피에르는 루소(1712~1778)의 영향을 받았다. 루소는 직접민주주의를 옹호했다. 대의제를 반대했다.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선거는 4년이나 5년에 한 번씩 투표할 때만 주인과 자유인이 되고 선거만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가는 제도이다.”

 


선거와 간접제헌도 싫어했다.

 

 

 


그의 이상은 높았다. 그는 고대의 공화주의를 기준으로 삼아 평등주의적 열정을 추구했다. 마키아벨리를 존경했고 스파르타를 이상적인 공화국으로 생각했다. (몽테스키외는 싫어했다.)

 


그의 이상은 결벽에 가까웠다. 그는 이상적인 방법과 이상적인 성취를 추구했다. 마키아벨리와, 몽테스키외, 루소를 거치는 동안 세상을 이해하는 관점은 덕성(‘시민적 덕성’, ‘경제적 종속으로부터 시민의 자율적 독립’, ‘부패방지’)에서 이해관계로 바뀌었다. 전에는 인간의 덕성에 기대어 세상을 해석했지만, 후에는 이해관계 즉 이기적인 인간들이 사회적 계약을 통해 공동체와 국가를 성립하고 유지한다고 본 것이었다.

 


루소는 고집스럽게 전자의 인식을 추구했다. 그는 순수한 공화주의적 열정을 회복하고 싶어 했다. 회복할 수 있다가 아니라 실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생각의 바탕 위에서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자연적인 선함과 이성을 빌혀 고대의 공화주의를 현대에 회복시키고 싶어했던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가들은 루소를 반대했지만 그들 역시 이상적으로 생각한 부분이 있었다. 대표자의 의지와 국민들의 의지는 일치할 것이기 때문에 루소가 우려한 대로 국민이 노예가 될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역시 위험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였다. 그는 너무 많은 피를 흘렸고, 국민들이 피의 숙청을 그와 똑같은 마음으로 응원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로베스피에르는 ‘루소의 이상’과 ‘루소의 이상을 거부한 사람들의 이상’이 탄생시킨 비극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유능하고 깨끗하고 청렴했다. 그리하여 별명이 ‘부패할 수 없는 자’였다. - 독선에 빠져 죽는 그 순간에도 마음에는 이상에 대한 열망과 약자를 향한 연민이 가득했을 것이다.

 


참고>

홍태영, <개인이 아닌 시민으로 살기>, 김영사,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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