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민주주의의 기본정신

짱구는옷말려요 2020. 6. 2. 10:30

민주주의의 기본정신

 

 

 


다수의 전능

 

 


‘민주주의적 전제정’

 

 


프랑스 학자 토크빌(1805~1859)이 쓴 용어다. 그는 제정기로부터 왕정복고, 7월 왕정, 제2공화제, 제2제정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그런 만큼 안정된 나라를 갈구했다.

 


그는 혁명에 혁명을 거듭한 프랑스와 달리 안정적인 정치체제를 유지하는 미국이 궁금했다. 그는 1831년 4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미국을 직접 다녀보고 자신의 연구를 이어갔다.

 


토크빌은 어떤 면에서 프랑스는 혁명 이전부터 민주정이 들어섰다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는 민주정은 왕과 백성 사이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이었는데, 프랑스는 왕권이 강해 귀족은 거의 힘이 없었다. 그런 면에서 프랑스의 민주주의는 오랜 역사를 가졌다고 본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 이래 프랑스에서 민주주의는 그리스 아테네에서 이루어졌던 직접민주주의를 의미.)

 


이런 중앙집권적 성향은 혁명 이후에도 여전했다. 어떤 이는 귀족의 말살이 혁명의 결과라고 말했지만 그는 그것이 프랑스의 원래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구체제와 프랑스 혁명’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중간 매개 권력을 제거해버렸으며 따라서 중앙 권력과 개인들 사이에는 거대한 텅 빈 공간만이 남아 있었다. 중앙 권력은 사회적 기제의 유일한 원동력이었고, 공공생활에서도 필요한 유일한 행위자로 등장하게 된다.”

 


그는 귀족이 가지는 공적인 덕성에 주목했다. 민주정은 평등과 개인주의로 공적인 덕성이 사라지고 결국 노예의 상태가 된다고 봤다. 덕성이 약화되고 개인들이 그저 물질적인 부분에만 집중하게 되면 강력한 힘을 가지는 유일한 개체는 국가가 되고, 이는 곧 전제정으로 귀결된다는 생각이었다. 요컨대, 민주주의가 개인주의를, 개인주의는 진정한 인간의 개인성을 소멸시킨다고 본 것이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매우 허약하다. 그러나 모든 개인을 대표하고 모든 개인을 포괄하고 있는 국가는 매우 강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처럼 시민이 하찮은 존재로 전락하는 것은 없다.”

 

 

 


반면, 귀족들의 시대는 평등하지도 모두가 자유롭지도 않지만 귀족들이 나름의 개성과 색체, 삶의 윤곽과 자부심을 유지하는 까닭에 민주주의 시대에 나타나는 동질화가 없다고 봤다. 그는 평준화된 민주주의 시대를 이렇게 설명했다.

 


“국민의 동의 없이 국민의 이름으로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수권자가 전체 국민 위에 군림”하는 시대, 혹은 ‘다수의 전능’이 입법자의 전제주의를 가능케 하는 암흑기라고 했다. 절대왕정, 자토뱅 통치, 나폴레옹의 치세가 바로 그러했다.

 


토크빌은 귀족을 대신할 중간 권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미국에서는 지방분권이 그런 환경을 조성했다. 또한 동네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자발적 결사체였다. 이 작은 결사체에서 결정된 사안은 주정부를 거쳐 연방정부까지 올라갔다. ‘다수의 권능’에 힘 입은 하향식이 아닌 상향식 민주주의였다. 국가 권력을 제한하는 집단의 형성이 가능한 환경이었다. 이렇게 미국에는 몽테스키외가 민주주의를 타락시킨다고 본 극단적 평등 정신이 작동하고 있었지만 이를 제어한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고 있었다.

 


사족을 달자면 토크빌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루소를 멀리하고 몽테스키외를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도쿠가와 요시무네(1684~1751)도 ‘중간’ 혹은 ‘결사체’을 없애는데 성공했다. 에도 시대의 8번째 쇼군이자 개혁 군주였던 그는 권력을 통제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무사의 ‘의무’를 강화했다. 무사들이 문란하고 나약하다고 비판하면서 무술 수련을 강조했다. 무사들은 숙제가 많아진 만큼 딴 데 신경을 쓰거나 윗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내는 일이 줄었을 것이다.

 


더 치명적인 족쇄가 있었다. 메야스바코(目安箱). 평민들이 야쿠닌들의 부정과 비리를 투서할 수 있게 했다. 권력자들은 사방에 달린 눈에 긴장을 해야 했을 것이다. 누군가의 밀명을 받고 ‘거짓말’로 투서를 한다 해도 이를 밝혀서 무죄를 입증할 방법도 없었을 테니까. - 거짓 증인은 고대부터 자주 쓰였고 당하는 사람은 대부분 피해가기 힘들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도 비슷한 방법을 썼다. 그녀는 궁에 동궤를 설치했다. 동으로 만든 상자였다. 동이었기 때문에 부수기도 힘들었다. 이 궤는 황제 외에는 아무도 열어볼 수 없었다.

 


여기에는 지방관과 권력자들의 비리를 담은 문서가 담겼다. 누구나 투서가 가능했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에게는 숙식까지 제공했다. 밀고의 내용으로 작위를 내리거나 상을 베풀기도 했다. 이른바 ‘밀고자 전성시대’를 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과 행동을 백성의 뜻이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결론은 선의로 포장된 독재였다.

 

 


이 부분에서 히틀러가 빠질 수 없다. 그는 국민을 두 부류로 나누었다. 유익한 국민과 쓸러버려야 할 2등 국민이었다.

 


‘열광적인 대중만이 관리 가능하고, 감정이 없고 둔감하기만 한 대중은 공동체에 가장 큰 위험이다.’

 


히틀러가 이 말을 했던 날, 독일 국회에서는 수권법(전권위임법)을 승인했다. 나치에 무제한적 입법권을 인정해주자는 취지였다. 히틀러는 나치당에 열광하지 않는 모든 ‘민중’을 배척했다. “생각은 적게 행동은 많이” 혹은 “생각은 나치가 행동은 추종자가”라는 해석이 가능할 듯하다.

 


히틀러는 같은 연단과 동일한 연설자, 같은 제목의 연설이라도 대낮에 하면 잘 안 먹힌다고 생각했다. 청중 개개인의 에너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반면 밤에는 강한 의지에 쉽게 굴복한다고 봤다.

 


히틀러는 말장난을 잘하는 사람 답게 자신의 독재를 그럴싸하게 포장했다. ‘더욱 고차원적인 민주주의’. 이런 말장난에 넘어난 청중은 독재자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감에 넘쳐 자신의 말장난과 관련한 지론도 남겼다.

 


‘천국을 지옥으로 생각하게 할 수 있고, 반대로 지옥 같은 비참한 생활을 천국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의회는 목적이 아니며 단지 목적에 이르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나치당은 지도자에게 무조건적인 복종과 충성을 요구하는 ‘지도자 원리’를 주창했고, 이를 바탕으로 핵심 세력을 단단히 묶고 대중을 포섭했다.

 


참고>

쉬후이, 이기흥ㆍ신종욱 옮김, <뻔뻔하고 독한 자들 전성시대>, 미다스북스, 2014년

홍태영, <개인이 아닌 시민으로 살기>, 김영사, 2019년

20세기독일사연구회, 송태욱 옮김, <히틀러의 100가지 말>, arte,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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