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한족의 기원
스을쩍
몽골이 물러난 후 명과 주변국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다. 명의 영역을 어디까지로 볼 것이냐의 문제였다. 일종의 유산 상속 분쟁이었다.
고려는 지금의 중국 땅 안에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1230년대, 몽골과 고려가 한창 전쟁 중일 때 고려의 백성들이 대거 요동으로 들어갔다. 공부 목적도 있었지만, 관직에 오른 자도 있었고 장사하러 떠난 사람도 있었다. 공민왕 3년(1354년)에 중국 강남의 반정부 세력(장사성)을 토벌할 때 고려인이 2만3,000명이 동원됐다. 고려군이 1370년에 우라산성을 공격할 당시 요동의 고려인 인호가 1만여 호에 달했다.
충렬왕은 쿠빌라이에게 요동에 이주해 살고 있는 고려인을 자신의 사속(私屬-노비) 인호로 삼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칸은 승인을 해주었다. 그들이 몽골 제국 안에서 소유한 토지를 비롯한 재산도 만만찮았을 것이다.
몽골에 이어 중국을 장악한 주원장은 욕심이 많았다. 홍무 원년(1368년), 대도를 장학한 뒤 요동 방면으로 밀고 올라오려고 했다.
‘황제가 새서(璽書)를 내려 말하기를 “... 나의 군사가 아직 요심에 이르지 않았으니 그 사이에 간혹 강포한 자들이 출몰할 것이다. 그들이 중국의 근심이 되지 않더라도 고려의 우환으로 될까 우려스럽다.”’ - <고려사> 권42, 공민왕 19년(1370) 4월
나하추와 같은 몽골제국의 잔당들이 독자세력들이 웅거하고 있었다. 이를 제거한다는 명분이었고, 더불어 요동 땅에 대한 지배권을 명백히 하겠다는 의도였다.
고려 밖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되찾아가는 작업도 했다. 우왕 2년(1376년)에 처음 그런 요구를 했다. 우왕 12년(1386년)에는 1359년에 홍건적을 피해 두려워 도망간 군민 4만여 호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1388년(우왕 14)3월에는 현재의 함경도 남부에 철령위를 설치해 명의 영토로 삼으려 했다. 고려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 일대가 예전부터 고려의 영역이었고, 원에서 쌍성총관 등의 관원을 둔 적이 있었지만 공민왕 5년(1356)에 모두 폐지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었다.
명은 제주도까지 탐냈다. 제주도에는 몽골 황실과 정부에서 설치한 대규모 목장이 있었고, 말을 관리하는 몽골인 전문가도 파견되어 있었다. 원 황실은 제주도를 마지막 피난처로 모색하기도 했다.
고려 시절인 공민왕 16년(1367)에 제주의 영토와 인구를 고려가 관할하겠다고 해서 승인을 받았다. 명나라는 해안 방어를 위해서 제주도를 내놓으라고 했다. 그는 훗날 “탐라는 원래 원조에 속해 있었으나, 거기서 나오는 말은 내가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제주도에 거주하는 몽골인은 자신들이 키운 말을 명에서 가져간다는 사실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고려는 최영을 사령관으로 삼아 2만 5,000여 병력을 동원하여 제주도를 공격했다. 가만히 두었다가는 왜구와 손을 잡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한 마디로 명은 원이 쥐고 있던 주변 국가에 대한 영향력을 그대로 이어받기를 원했다. 원을 배척한 국가지만 후계자를 자처한 것이었다.
홍무제는 황제에 등극하기 석 달 전, 북벌군을 출동시키면서 격문을 발표했다.
‘옛말에 이르기를, 오랑캐에게는 100년 가는 운이 없다고 한다.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자! 기강을 바로 세우고 이 백성을 구제하자!’
원은 오랑캐고 자신들은 중화의 핵심이라는 뜻인데, 그렇다면 명이 물려받아야 할 것은 원이 아니라 송의 유산일 것이었다. ‘중화’ 명에게 허락될 땅은 화이허(淮河-하남성 동백산에서 발원 황하로 흘러듬)남쪽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원의 수도 대도는 936년 이후 400여년 동안 후주-북송-남송으로 이어지는 한족 왕조의 땅이었던 적이 없었다. 몽골제국은 ‘중화’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특히 운남 일대는 1253년 쿠발라이 칸이 점령하기 전에는 ‘대리국’이 자리잡고 있었다. 대리국은 다양한 부락과 부족의 집합체였다. 명은 이 지역을 대리부(府)로 삼았다.
티베트는 종교적으로 몽골과 단단하게 얽혀 있는 관계였다. 명이 티베트에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도 원 덕분이었다.
결적으로 1522년 명의 영토는 1022년의 북송보다 30%나 넓어졌다. ‘중국’이 아닌 곳이 ‘중국’에 편입된 것이었다. 겉으로는 ‘구축호로(驅逐胡虜恢復中華)’를 외치면서도 욕심을 다 차린 셈이었다.
이후 중화민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멸만흥한’의 구호를 내걸었지만 청나라(만주족)가 차지한 신장, 몽골, 티베트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몽골이 등장하기 이전인 10세기에 13세기 전반까지 동아시아는 다원적인 세계였다. 중국은 끊임없이 분열했고, 어느 한 나라도 패권을 온전하게 쥐지 못했다. 주변국에서도 독립적인 국가로 남으려고 했다. 고려의 지식인들 중 다수가 ‘천하란 중국을 중심으로 한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고려)을 중심에 둔 별도의 천하가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은 결코 세상의 중심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원의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명과 지금의 중국 역시 한때의 몽골만큼 글로벌한 국가는 아니다.
‘한족의 나라’ 중국은 원과 만주족이 장악한 영역까지 스을쩍 자기 것으로 가져가 버렸다. 그 부작용이 지금 중국이 겪고 있는 다양한 인종ㆍ지역적 갈등인지도 모른다.
참고>
정요근 외, <고려에서 조선으로>, 역사비평사,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