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프로듀스 x 101 순위조작

짱구는옷말려요 2020. 1. 30. 19:36

프로듀스 x 101 순위조작


다행이다






‘프로듀스 101’ 순위 조작 사건으로 아직도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방송으로 진행한 아이돌 선발 대회에 부정이 개입했다는 것이다. ‘시험’에 민감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조작이나 부정은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한류의 경쟁력이라는 측면에서 봐도 몇몇 ‘거물’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진짜 재주꾼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지 못할 것이다. 분노할 만하고 법정에서 시비를 가릴 만한 일이다.



조선 시대보다 더 치열하게 시험에 시달린 시절이 있었을까. - 양반들에 국한되었긴 했어도 그 치열함은 요즘 수험생이나 취준생 못잖을 것이다.








과거에서 가장 중요한 작용한 것이 ‘가문의 브랜드’였다. 명문가 자제는 아무래도 유리했다. 컴퓨터 채점 방식이 아니라 사람이 읽어서 판단한 과거의 시험 방식은 더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프러듀스 101’도 몇몇 이름 있는 기획사에서 결과를 좌지우지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브랜드 파워의 영향은 비슷한 듯하다.



안동 외내마을(군자마을)에 살았던 김령이라는 인물이 일기를 남겼다. 27세인 1603년 7월1일부터 6141년 3월12일까지 쓴 <계암일록>에는 시험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먼저 고강에 관한 이야기. 지역 감사나 수령은 과거를 앞두고 고강을 실시했다. 교생들은 고강에서 떨어지면 군역에 충정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군대도 가고 신분도 하락할 상황이었으니 얼마나 살 떨리는 시험인가.



원론은 그런데, 실제는 많이 달랐다. 웬만하면 통과시켜주었다. 1,000명 중 떨어지는 사람은 고작 20명이었다.







김령은 더 한심한 고강을 경험했다. 고강에서 떨어진 유생들이 두 번째 기회를 얻어서 시험을 치르던 중에 문중 일족들이 시험관과 함께 방에 앉아 번갈아 가면서 술을 돌렸다. 그 틈에 바깥에 있던 수험생들은 시제를 빼냈다. 이 정도 되면 고강은 그저 형식적인 행위에 불과했다.



과거 시험도 순탄치는 않았다. 김령은 1613년(광해군5년) 영천에서 시험을 봤다. 출제위원장(경시관)과 친하게 지내던 인물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응시생은 시험의 공정성을 의심했고, 시험은 한없이 지체됐다.







결국 응시자 중 한 명이 머리를 다쳐서 피가 났다. 시험관들이 소요가 일어날까봐 출제위원장과 연고가 있는 상주, 함창 사람들을 시험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했으나 1,000명이 넘는 수험생은 모두 시험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에 시관이 사과를 했고 응시자들은 돌아왔다.



김령도 돌아왔지만, 내내 찜찜해 했다. 그는 시험장에 다시 들어간 것을 비루한 짓으로 여겼고, 마치 똥물로 목욕한 것 같다며 후회했다.



그러나 후회도 잠시, 합격했다는 이야기를 들고 다음 시험장으로 달려갔다. 다음 시험이 열리는 곳은 용궁이었다.







여기서도 또 출제위원과 응시가 사이의 갈등이 빚어졌다. 응시자의 항의로 세 번이나 시제를 바꾸었다. 두 번은 답이 뻔한 시제였고, 나머지 한번은 신하로서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문제는 냈다고 항의했다. - 입에 올리기 힘들다는 시제는 ‘신하가 임금 보기를 원수와 같이 여긴다.’였다.



시관들은 시험의 전말을 조정에 보고했다. 시제를 몇 번이나 바꾸었는데, 시제를 바꿀 때도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는 고자질과 함께 출제진(시관)을 능멸하는 영남 선비들의 고약한 습속을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음 시험에서는 더 큰 일이 벌어졌다. 경상우도의 감시에서였다. 이번에도 응시생들이 시제를 바꾸어달라고 요구했다. 시험관은 이를 거부했다.



혈기가 왕성한 이들의 말투가 거칠어졌다. 마침내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시관의 밥그릇이 깨졌고, 부시관으로 앉아 있던 풍기 수령이 돌멩이에 가슴을 맞았다. 방으로 달아난 자도 있었다. 기왓장과 돌이 날아들었다. 기둥과 벽이 부서졌다. 이에 감사 류영순이 주동자 8~9명을 잡아서 가두었다.






역사는 과거의 부정과 문란은 전국적 현상이었다고 전한다. 과거의 공신력이 떨어졌다. 급기야 과거 합격이 의미 없어질 정도로 합격자 수가 많아지고 매관매직이 일상화됐다. 시험이 건전성을 유지했다면 조선의 마지막은 사뭇 달라지지 않았을까.



투표 조작과 관련해 담당 PD들이 구속의 위기에 놓인 이 상황은 씁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스럽다.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니까. 게다가 과거처럼 특수 계층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계층이 눈여겨보는 일이라 개선의 가능성은 더더욱 높을 것이다. 다행이다.


참고>

김학수 외, <후조당 종가의 가문 세우기>,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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