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페낭
‘악마의 연기’와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소녀들
도시에는 돈과 사람이 모이고 흐른다. 흐름이 지속되면서 부족한 것이 채워지고 넘치는 것들이 상쇄된다. 문제는 그 흐름이 가파를 때다.
말레이시아 페낭은 1785년 영국에 할양됐다. 영국은 이 도시를 자유무역도시로 키웠고, 이후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영국인 사업가와 인도~중국의 해상 교역을 방해하는 네덜란드를 방어하기 위해 온 영국 군인들, 중국인 자본가와 가난한 노동자가 뒤섞여 혼잡한 도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런 역사의 배경에는 통조림용 양철통이 있었다. 1850년대 깡통따개가 발명되면서 군용 식품에서 일반 식품으로 전환되었다. 이후 말라카 해협 일대의 ‘주석벨트’는 깡통 생산기지가 되었고, 영국인들과 함께 중국인 자본이 흘러들었다. 페낭은 그 중심지였다.
1879년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였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페낭을 방문했다. 페낭을 점령한 뒤 한 세기가 지난 뒤였다. 영국인의 눈에 비친 영국 식민지는 평화롭고 활기찼다.
‘조지타운은 아시아계의 도시다. 중국인, 버마인, 자바인, 아랍인, 말레이인, 시크교도, 마드라스인, 클링인, 출리아, 파시교도 등 아시아계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운다. ...이주자들은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고, 궁핍에 빠지지도 않으며, 저마다 고유의 의상과 관습과 종교를 유지한 채 페낭에서 질서를 지키며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있다. ...페낭의 아시아계 이주민들은 영국의 지배 아래 생명과 재산을 확실하게 보장받으며, 영국의 식민지 법정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는 뜻이다.’
실상은 조금 달랐던 듯하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는 그닥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를테면, 노동자는 열심히 일했고, 노동의 고단함을 아편으로 달랬다. 아편을 사느라 쓴 돈은 다시 자본가에게 돌아갔다. 불평등은 노동으로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힘들여 번 돈을 쉬는데 다 썼다는 거였다. 그것도 한 달 월급이 일주일치 아편값으로 사라졌다. ‘악마의 연기’였다.
값싼 노동력을 찾다가 코미디 같은 일까지 벌어졌다. 페낭은 원래 호주처럼 죄수를 살게 하는 수형식민지였다. 1800년 이후 조지 리스가 페낭부지사로 조지타운에 부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죄수를 수용하던 데서 그쳐 죄수를 노동자로 활용하기로 했다. 보통 임금의 40% 값으로 노예를 부렸고, 노예의 숫자는 1800년 130명에서 5년 만에 772명으로 늘었다.
죄수에서 노동자로 신분이 상승한 탓인지 수감 시설도 달라졌다. 감옥이라기보다 숙소 주변에 맹수를 막는 울타리를 치는데 그쳤다.
죄수 중 최고의 직업은 순사가 아니었을까. 1867년 당국은 죄수들을 현지 죄인을 포박하는 노역에 동원했다. 죄수가 죄수를 묶는, 웃지 못할 장면이 펼쳐졌다.
노예도 빼놓을 수 없는 구성원이었다. 노예를 폐지한 뒤로도 노예는 여전히 존재했다. 1801년 1,200명, 1805년 1,400명, 1807년에는 부채노예가 조지타운에만 3,000명을 헤아렸다.
특히 여성노예를 주목할 만하다. 특히 여성노비는 패낭의 남녀성비가 극도로 불균형했던 까닭에 초기에는 매우 비싼 값으로 거래됐다. 말레이제도의 가난한 여성들이 인신매매업자들에게 속거나 빚에 팔려서 싱가포르와 페낭으로 흘러들었다.
중국인 여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 여성은 1877년 페낭에 팔려와 14살부터 4년 동안 성매매에 시달렸다. 주로 광동 출신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인신매매를 당했다. 업자들은 이들에게 “페낭에 가면 간호사, 봉제 노동자, 미용원, 부잣집 하녀로 일할 수 있고 보수도 두둑하다”는 말을 듣고 배에 몸을 실었다.
페낭에 도착하면 여자들은 중개인에게 넘겨졌고, 중개인은 100~300달러를 주고 데려온 여성들을 ‘웃돈’을 얻어 다시 샀다. 1863년 한 화인(중국인) 비밀결사가 중국 여성 500명을 데려왔다. 싱가포르에서 한 사람당 100~400달러에 넘겨졌다. 1863년 싱가포르 화인 여성 인구는 4,000명 중 인신매매로 흘러들어온 여성은 2,500에 이르렀다. 페낭도 상황이 비슷했을 것이다.
매춘부 중에는 일본인도 있었다. ‘가라유키상’으로 불렸다. 1880~1930년대 페낭으로 들어온 이들 역시 인신매매 업자의 꾐에 넘어간 이들었다. 가난한 일본 농민의 딸이었다. 조지타운 페낭시립운동장 인근에 이들의 묘가 있다. 묘비도 없는 초라한 묘다.
말레이반도의 여성들은 매음굴에서 구출되어도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치 않았다고 한다. 일본인 여성들은 어땠을까?
참고>
강희정, <아편과 깡통의 궁전>, 푸른역사,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