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근대화론
‘일제에 의한 경제 발전론’
1980년대 한국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다른 개발도상국들이 곤경에 허덕이는 상황과 사뭇 달랐다.
“이런 한국의 저력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그때 주목한 시점이 일제강점기였다. 경제학계는 상세한 통계를 활용, 일제강점기 시대의 경제 발전 및 근대화를 증명하려고 했다.
연구자들은 당연한 줄 알았던 ‘토지 조사 사업에 의한 토지수탈’이 허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수탈은 존재했지만, 국가권력이 개입한 건 특별한 경우에 한한다고 설명했다.
경제적 수탈을 부정한 일련의 발표는 ‘식민지근대화론’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다.
공산주의 이론이 개입한 여지도 보인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에서 착취는 일상적이라고 본다. 그 잣대로 보면 일제강점기의 착취나 해방 이후의 착취가 큰 차이가 없어보인다. 게다가 해방전 일본 제국주의, 해방 후 미국 제국주의라고 해버리면 일제를 비난한 이유가 없어져버린다. 민주화운동 세력 중 주사파(주체사상파, NL파)가 바로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착취가 자본주의 착취와 다를 바 없다는 시각을 투여했다. -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일제강점기를 논할 때 ‘수탈’이라는 용어 자체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식민지근대화론 1 - ‘식민지 조선 경제 발전론’
많은 공장들이 세워졌고, 식민지 후기 일제의 병참기지 역할을 하면서 발전했다는 것. 이들은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통계 수치를 저극 활용한다. - 김낙년 편, <한국의 경제 성장: 1910-1945>,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 반론 - 조선총독부통계자료에 기록된 조선인의 임금은 위조되었다. 실제 받은 임금과 사뭇 차이가 난다. 식민지근대화론에 기울어진 학자들은 이 위조된 통계를 인용했다.
1924년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총독부는 일본인 인부의 하루 품삯이 1엔75전, 조선인은 81.5전이라고 했으나, 1924년 4월 9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35전이라고 했다. 실제 임금은 절반이 아니라 1/6에 불과했다.
1932년 오사카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하루 평균 1엔34전을 받았다. 이런 임금 차 때문에 조선인들을 돈을 벌기 위해 노동자로 꾸준히 일본에 유입됐다.
# 식민지근대화론 2 - ‘일제에 의한 경제 발전론’
일제에 의해서 경제가 발전했다는 주장이다. 일본으로부터 대규모 보조금이 들어왔고, 이 자금이 조선 곳곳에서 대규모 토목사업 등이 시작됐다고 설명한다. 조선의 인프라가 정비되고 경제 발전의 기초가 만들어졌고, 이것이 경제 발전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 반론 – 경성상공회의소에서 출판한 <경성상공회의소이십오년사>(1941년) 등에 따르면 일본은 조선의 공업이 발전하는 것을 경계했다. 만주국이 세워진 이후 공장을 증설했지만 이마저도 숫자를 제한했다.
일제는 의도적으로 농업만 발전시켜 조선의 경제를 위험한 구조로 만들었고, 일본에서 들어온 보조금은 대부분 일본인 토목청부업자들에게 흘러들었다. 토목공사는 조선 경제를 위해 진력했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기에도 좋았다.
또한 교통비와 전기 요금 등이 일본보다 이상할 만큼 비쌌다. 이 또한 공업을 억제하려는 의도적인 정책이었다고 본다.
# 식민지근대화론 3 - ‘조직적 수탈 부재론’
정치적으로 악행을 저질렀지만 2차 세계대전 말기를 제외하면 의도적으로 경제적인 수탈을 저지른 적은 없다는 주장이다.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으로 본격화한 쌀 수탈을 허구로 본다. 토지조사사업 직후 일본인 지주의 토지 소유가 대폭 늘어난 증거도 없고( 조석곤, <수탈론과 근대화론을 넘어서>, <<창작과 비평>> 25-2호, 1997; 허수열, <일제시대 개발은 ‘개발 없는 개발’>, <<월간 말>> 227호, 2005, 109쪽.), 쌀의 경우도 일본이 30% 정도 비쌌기 때문에 경제 원리에 따라 일본으로 수출되었다고 설명한다. - 이영훈, <대한민국 이야기: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 기파랑, 2007
▶ 반론 – 토지조사사업을 하는 동안 철도, 도로 공사 등을 통해 많은 토지를 빼앗았다. 쌀 수탈과 관련해서도 쌀값이 30%정도 비쌌다고 하지만, 세계 대공황과 쇼와공황 때도 가격 차가 24.7%밖에 되지 않았고, 평균 10% 안팎이었다. 이 가격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쌀을 수출할 리는 없었다. 일제의 개입이 없이는 불가능한 기아수출이었다.
# 식민지근대화론 4 - ‘일제 권력의 경제 악용 부정론’
경제란 자발적이고 일상적인 거래가 중심이기 때문에 (일제)권력이 경제 영역까지 영향을 미치기 힘들었다고 주장한다. - 김낙년, <<일제하 한국경제>>, 해남, 2003, 2~3쪽
▶ 반론 – 일제는 재정과 금융에 적극 개입했다. 일본인에게 유리한 정책을 펼쳤다. 일본인은 이자가 5%였고, 조선인은 10%였다. 빈털터리로 들어와 돈을 번 일본인들이 고리에 뛰어들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일본인은 신분증만 있어도 불로소득이 가능한 세계가 식민지조선이었다.
이 외에도 조선인 노동자는 임금을 받으려고 사업자에게 항의하다가 몰매를 맞아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물건을 사고 팔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인의 억지를 막을 길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적정 임금이나 정당한 거래를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경찰과 법원 등 모든 분야에서 일본인에게 유리한 정책들이 펼쳐졌다. 일제는 조선인의 일상적 경제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 식민지근대화론 5 - ‘경제 이익의 평등 파급론’
‘이중구조’를 비판하는 이론이다. 이중구조는 한반도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에 적용되는 경제 구조가 달랐다는 이론이다. ‘경제 이익의 평등 파급론’은 경제 발전의 혜택이 일본인과 조선인 모두에게 고루 돌아갔다고 본다. 호리 가즈오가 1995년에 출판한 <<조선 공업화의 사적 분석>>에서 이런 주장을 펼쳤고고, 김낙년도 2003년에 출판한 <<일제하 한국경제>>(해남)도 같은 주장을 담았다.
▶ 반론 – 1950년대에서 50년대 사이 일본의 도시와 농촌 사이의 임금 격차는 100대 47이었다. 이를 ‘이중구조’라고 불렀다. 이 ‘이중구조’는 경제성장으로 해소되었다. 조선의 경제 상황은 ‘이중구조’라고 부르기에 충분했다.
참고>
도리우미 유타카, <일본학자가 본 식민지 근대화론>, 지식산업사,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