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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장군의 석문 전투에 대해...

짱구는옷말려요 2024. 2. 27. 01:12

김유신 장군의 석문 전투에 대해... 

 

 


죽음 같은 시간

별이 떨어졌다. 673년 1월, 신라의 황룡사와 왕이 기거하는 궁 사이로 큰 별 하나가 곤두박이쳤다. 6월에는 대궁 뜰에 호랑이나 침범했다. 모두 불길한 징조였다. 다음 달, 신라의 큰 별이 떨어졌다. 김유신이 79세로 사망했다. 문무왕은 군악 고취수 100명과 곡식을 보내 유족을 위로했다.

김유신은 신라군의 기둥이었다.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왕을 모셨고, 통일 전쟁에서도 가장 빼어난 활약을 펼쳤다. 신라군에게 김유신은 그 전공보다 오히려 부하를 사랑하는 장수로 더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삼국사기에 이런 일화가 전한다. 황산벌 전투가 끝난 후 소정방이 어거지로 죄를 뒤집어씌워 김유신의 부하를 죽이려 했다. 김유신이 왕에게 받은 도끼를 들고 “나는 죄가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고 말했다. 그 일로 부하는 목숨을 구했다. 그 기개와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 앞에서 누가 감동하지 않았을까.

김유신의 묘는 전형적인 신라 왕릉의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 42대 흥덕왕(재위 826-836) 때 흥무대왕으로 추존되기도 했다. 그는 임금 이상의 장군으로 존경받고 있었다.

김유신의 죽음을 곧 신라의 몰락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신라는 삼국통일의 과업을 시작한 이래로 최악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장군의 별세하기 3년 전, 신라는 당과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했다. 출발은 좋았다. 설오유의 부대가 요동에서 활약해 당군의 남하를 견제했고, 이듬해(671년) 10월 6일에는 신라 수군이 당의 조운선 70여 척을 습격해 병사 100여 명을 사로잡았다. 익사한 적군이 다수였다. 이 전투로 당은 보급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672년 8월 이전까지 별다른 전투를 벌이지 못했다.

신라가 무너진 것은 석문 전투에서였다. 672년 황해도 한시성, 마읍성, 백수성 인근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초반에는 승기를 잡았다. 분열이 일어난 것은 공명심 때문이었다. 홀로 떨어져 주둔한 장창당, 즉 장창보병 부대가 당군을 제압했다. 이에 다른 부대(당)들도 각자 흩어져 우뚝한 공적을 쌓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공명심이었다. 이는 곧 4만이 당군에게 격파당하는 비극으로 귀결됐다. 7명의 장수가 목숨을 잃었다.

석문 전투에서 싸운 신라군은 정예병이었다. 핵심 전력이 무너진 것이었다. 석문 전투 패배 이후 같은 해 겨울에 횡수에서 신라군을 다시 한번 깨졌다. 673년 윤5월에는 고구려 부흥 세력이 격파당했다. 이전까지 고구려군은 신라와 연합해 당군에 맞섰다. 이 패배로 고구려 세력은 완전히 소멸했다.

 


신라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672년 8월 석문 전투 패배 이후 당에 사죄사를 파견했다. 사죄사가 가지고 간 표문에는 ‘아무개를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죽을죄를 지었고 또 지었습니다.’하는 문장이 담겨 있었다. 맨입으로 보낼 수도 없었다. 은 3만 3,500푼, 구리 3만 3,000푼, 침 400개, 우황 120푼, 금 120푼, 40승(升)포 6필, 30숭포 60필을 함께 실어 보냈다.

669년 4월에 다시 사죄사를 파견했다. 옛 백제 영토 일부를 점령한 뒤였다. 신라는 시간을 벌고 적국을 염탐할 기회였다. 당 역시 전열 정비를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사죄를 수용하는 척을 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사죄사를 보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오히려 일이 쉬웠을 것이다. 당의 탐욕을 잘 알고 있는 신라로서는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669년 사죄사를 파견한 뒤 오골성을 칠 준비를 했고, 672년 사죄사를 보낸 뒤에는 전국적으로 성을 쌓는 작업을 했다. 675년에 사죄사가 다녀온 뒤에는 임진강에서 당군의 공격을 힘껏 막아냈다. “죄송합니다.”하고 공손하게 처분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사죄사 파견은 당의 공세를 늦추는 성과를 냈고 신라는 이 시간을 적극 활용했다. 굴욕을 감내해가며 결전 의지를 불태운 것이었다.

 



신라는 죽을힘을 다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기둥 같은 김유신이 사망한 것이었다.

김유신이 떠난 후 최악의 상황이 전개되었다.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도 힘이 부치는 상황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이 또한 당나라의 전략 중의 하나였다. 대토라는 자가 당의 꾐에 넘어가서 모반을 꾸몄다. 이전에도 신라에는 친당파가 등장해 물의를 빚었다. 김유신의 사망 직후에 발각된 모반 사건은 신라 지도층에 더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신라의 민심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신라는 적과의 전쟁에 앞서 자신과의 싸움에 직면했다. 석문 전투에 괜한 공명심으로 패배를 맞이했고, 김유신이라는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사라지면서 그야말로 황야에 버려진 느낌에 시달렸을 것이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신라인들은 스스로를 믿고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고, 이 눈앞이 깜깜한 현실을 딛고 결국 소기의 성과를 성취했다. 신라는 죽음 같은 시간을 견디고 승리를 쟁취했다. 당나라 덕분에 한반도를 ‘그저 먹은’ 나라가 아니었다.

참고>
이상훈, <나당전쟁 건곤일척의 승부>, 역사산책,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