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권력 남용
문 닫으면 망한다
권력은 안정을 원한다. 혼란스럽거나 예측 불허한 상황을 원하지 않는다. 중국은 이 안정을 쇄국에서 찾았다. 잘 통하는 일부 국가와의 외교 외에는 문을 닫았다. 바다를 봉쇄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송대에는 거대한 정크선을 만들어 바다로 나가려고 애썼고, 남송대에는 해양 강국으로 통했다. 원대와 명대 초기만 해도 무장 함대를 갖추었고 정화의 원정은 유명한 사건이었다.
1397년(홍무洪武 30년) 해금 정책을 법률로 선언했다. 중국인이 바다로 나가거나 해상에서 무역하는 것을 금했다. 이런 정책은 청나라에도 계승됐다. 청나라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나뭇조각도 바다에 띄울 수 없다.”
이유 없는 정책은 아니었다. 명나라의 경우 자급자족적 경제를 추구하면서 안정을 꾀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철저한 무역통제를 통해서 자국경제의 완결성을 유지하려고 했다.
국제 정치적인 면에서도 바다의 봉쇄는 꼭 필요한 것처럼 보였던 듯하다. 바다를 막아 자기중심적인 대외질서를 구축하려고 했다. 중국은 또한 바다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세력을 차단하고 책봉조공관계에 있는 나라들과만 강화하려고 했다. 일본은 기독교 등 새로운 사상이 흘러드는 것을 방지하고 자본의 축적 등으로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는 것을 막으려고 바다를 장벽으로 삼았다. 중국은 비교적 국제적 규모이고 일본은 국내에 한정된 것이지만, 스스로를 축소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었다.
치안문제도 있었다. 원말명초에 왜구를 비롯한 해적들이 들끓었다. 이들은 연해에 상륙해서 소란을 일으키거나 연해 주민들과 밀무역을 해서 국가 기강을 어지럽혔다. 가만히 놔두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청나라 시절엔 조금 특수한 상황도 있었다. 반청 운동가들이 대만을 거점으로 삼은 적이 있었다. 청 조정의 입장에서는 바다와 그 너머의 세상이 위험하고 불손하기 짝이 없는 공간으로 비쳤을 것이다.
청 조정은 바다로 나가지 못하게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돛을 두 개 이상 단 선박의 제조를 금했다. 또한 무기를 들고 배를 타는 것도 금지시켰다.
일반 백성들 중에는 ‘목숨을 걸고’ 바다로 나간 이들이 있었지만, 이는 일부의 모험이었다. ‘대항해 시대’의 개막과 함께 나라가 나서서 무역과 모험을 적극 장려하는 서양과 비교해 동양의 해양 세력들은 작고 미미한 무리에 불과했다.
이런 바다 봉쇄 정책은 결국 아시아가 세계사의 변화에 둔감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지금은 바다보다 더 넓은 바다가 열렸다. 하늘이다. 하늘 길에 대한 갈망과 애착은 세계를 향한 도�! �과 모험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신공항 문제로 여론이 뜨겁다. 지역분쟁처럼 보이지만 하늘 길을 열려고 애쓰는 가운데 흘러나오는 목소리들이라면 희망적이다. 지금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바닷길을 포기한 명청대의 중국인처럼, 세계! 와 멀어지다가 결국은 쇠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방의 쇠락은 결국 전체의 쇠락으로 귀결될 것이다.
참고-조세현, <천하의 바다에서 국가의 바다로>, 일조각, 2015